[손혁재의 대선 길목 D-47] 여야 모두 색깔론 유혹 벗어나야
1968년 1월 21일 밤 늦게 1.21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북한특수부대 124군부대의 무장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1월 17일 국군복장으로 휴전선을 넘어 서울로 침투했습니다. 4일 만에 청와대에서 500여m 떨어진 지점까지 침투했습니다.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불심검문으로 이들을 막았고, 경찰과 이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29명을 사살했고, 1명을 사로잡았습니다. 1명은 북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우리 경찰은 34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다쳤습니다. 사로잡힌 김신조의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다”는 말에 시민들은 경악했습니다. 북한은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뗐으나 1972년 김일성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면서 시인하고 사과했습니다.
귀순한 김신조는 지금은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침례교회파)의 목사입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도주했던 무장공작원은 북한 인민군 대장까지 승진했습니다. 2000년에는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 이후 청와대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김정일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낸 송이버섯 선물을 전달하러 왔던 겁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은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강화시켰습니다. 향토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대가 창설되었습니다. 대학교는 물론 고등학교까지 군사훈련(교련)을 받도록 했습니다. 인왕산과 북악산, 청와대 앞길까지 시민의 통행이 금지되었습니다. 청와대 부근을 시민이 다시 다닐 수 있게 된 건 김영삼 대통령 때였습니다.
1.21사태를 계기로 창설된 향토예비군 제도를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때 김대중 신민당후보가 폐지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향토예비군은 이중병역의 의무를 강요한 위헌적인 것이며, 지휘계통이 국방장관과 내무장관 이중으로 되어 정치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고 생업에 지장을 초래할 뿐 아니라 민폐 조성, 부정부패를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하면서 김대중 후보는 ‘사상적으로 의심스럽다’고 비판받기 시작합니다. 김종필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DJ에 대해 사상 논쟁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71년 7대 대통령선거 때였다”고 기록했습니다. 1997년 대통령선거 때 DJP 연대 이후 지지자들로부터 “공산주의자 김대중을 왜 도왔느냐”는 거친 항의를 받았다고도 회고하였습니다.
‘4대국 평화보장론’ 공약을 내세운 뒤에는 ‘사상적으로 의심스럽다’라는 정치공세가 ‘빨갱이’ 낙인찍기로 강화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비판하고 미국 일본을 오가는 망명생활을 하면서 색깔론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김 대통령이 조직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이 재일동포 단체인 조총련의 지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조총련이 북한의 불순자금을 받는 이적단체이므로 한민통은 북한의 불순자금을 받은 반국가단체이고 그 수괴가 된 건 빨갱이가 분명하다는 논리입니다. 1980년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해 김대중 대통령을 죽이려 했습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죄목은 김 대통령이 북한의 사주를 받고 내란을 꾀했다는 겁니다. 물론 다 거짓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7년 제15대 대선 때도 색깔론에 시달렸습니다. 극우 논조를 펼치는 「한국논단」이란 잡지사가 ‘대선후보 사상검증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김종필 총리의 평가처럼 “누가 보더라도 김대중 국민회의후보를 겨냥”한 토론회였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건 6시간 동안 진행된 이 편파적인 토론회를 모든 TV가 생중계를 했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태극기부대로 불리는 일부 극우정치세력이 여전히 색깔론 공세를 펼치고 있습니다. 색깔론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과 달리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낡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저급하고 비열한 방법은 포기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과 당면현안을 해결할 정책대결로 가야 합니다. 색깔론의 유혹에 흔들리는 후보와 정당에 대해 절대다수 유권자는 외면할 것이 틀림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