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81] 14대(김영삼·김대중·정주영)·15대(김대중·이회창·이인제) 대선의 추억
‘3김’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정치인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난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김종필 국무총리입니다. 두 사람은 대통령이 되었고,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지 못하고 국무총리만 두 번 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3김정치’라는 말이 청산되어야 할 낡은 정치의 대명사처럼 쓰이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연히 비슷한 연배에 비슷한 시기에 정치를 했던데다 성이 같다는 것을 이유로 이들을 하나로 묶어 같은 부류로 취급하면 안 됩니다. 김종필은 박정희와 함께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정치군인이었고, 박정희 독재에 복무한 독재정치의 하수인이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양김’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던 민주투사입니다.
민주화 이후 김영삼은 김종필과 함께 노태우 민선군부정권에 투항하였고, 김대중은 이에 맞섰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갔다’던 김영삼은 마침내 대통령이 되어 5.16 쿠데타 이후 첫 민간인정부를 세웠습니다.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밀려난 김종필과 손을 잡고 대통령이 되었고,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뤘습니다.
3김이 정치를 하던 기간 중 양김이 대통령이었던 10년을 뺀 나머지 기간에 한국정치를 움직인 가장 큰 힘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에게 있었습니다. 3김은 대통령들에게 충성하거나 맞서 싸웠던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들의 정치생활에 공도 있고 과도 있지만 3김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정치의 문제점을 이들 탓으로 돌리는 건 잘못입니다.
오늘은 양김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날입니다. 1992년 오늘 치러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는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고, 5년 뒤 1997년 오늘 치러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3전4기로 당선되었습니다. 김종필은 제14대 대선에서는 김영삼 후보를 도왔고, 제15대 대선에서는 김대중을 도왔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평생 맞수였던 김대중 후보,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후보와의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관권선거를 꾀했던 초원복국집사건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DJP연대,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비리, 이인제 후보의 독자출마 등에 힘입어 역대 최소 득표율 차로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에게는 실패한 대통령,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따라다닙니다. 아들의 비리 문제와 IMF사태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적지 않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공직자 재산을 공개하도록 한 것,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없앤 것, 금융실명제를 도입한 것 등은 잊지 말아야 할 좋은 성과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IMF 조기극복과 IT 발전의 초석을 쌓은 것,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평화정착의 물꼬를 트는 업적을 남겼고, 우리나라 첫 노벨평화상도 받았습니다. 인권위원회와 반부패위원회도 만들었지만 ‘홍삼트리오’로 불리는 친인척비리로 부패 이미지를 갖고 대통령직을 마쳤습니다. 임기중 정리해고의 일상화와 비정규직 증가는 아쉽습니다.
문재인 제19대 대통령은 열두 번째 대통령입니다. 지금까지 모두 11명의 대통령이 있었지만 대부분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습니다. 망명했다가 죽을 때까지 못 돌아온 대통령, 군부에게 밀려난 대통령, 권력 내부다툼으로 비명에 간 대통령, 옥살이를 한 대통령, 정치적 탄압에 스스로 목숨 끊은 대통령 등입니다. 지금도 두 명의 대통령이 옥중에 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양김 대통령만 퇴임 후 수사를 받거나 옥살이를 하는 불행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아들비리와 IMF사태로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물러났습니다. 업적은 인정받았지만 김대중 대통령도 아들들 비리로 다소 빛이 바랬습니다. 내년 3.9대선에서 우리가 뽑을 대통령은 웃으며 즐겁게 퇴임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