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78] 최단 재임 체육관대통령 최규하
‘체육관선거’ ‘체육관대통령’을 기억하십니까? 대통령을 직접선거로 뽑지 않고 간접선거로 뽑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72년부터 1988년까지 16년 동안, 제8대 대통령부터 제12대 대통령까지 5대에 걸쳐 세 명의 대통령이 간접선거로 뽑혔습니다. 선거권자들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대통령을 뽑았기에 체육관선거 체육관대통령이라 불렀던 겁니다.
시민의 대통령 선출권을 박탈하고 체육관 선거를 만든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1969년 3선개헌으로 대통령 중임제한을 철폐하고 세 번째 출마한 박 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고전 끝에 당선되었습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주도한 관권부정선거가 없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며 “다시는 국민 여러분 앞에 나와서 표를 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약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유신체제로 영구집권의 기틀을 만들었습니다. 초원복국집 사건의 김기춘이 제정에 핵심역할을 한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시민이 뽑지 않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했고,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했습니다.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가의 정상기관이자 주권적 수임기관”이라고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박정희가 지명하는 국회의원을 추인하는 거수기였습니다. 제12대 대통령도 체육관대통령이지만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아닌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흔히 ‘통대’라고 불렸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은 물론 전국의 각 지역구에서 시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됐습니다. 누구를 지지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누구를 지지할지 뻔한 통대들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한 대통령은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입니다. 1979년 오늘은 두 번째 체육관대통령인 최규하 제10대 대통령이 취임한 날입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는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민주적 선거절차에 따른 새 정부 출범을 시민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체육관대통령을 보고 싶지 않다는 시민의 열망을 외면하고 체육관선거를 치렀습니다. 권한대행이라는 꼬리표를 떼었지만 최 대통령은 아무 힘도 없는 허수아비였습니다.
최초의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에게 휘둘렸습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도 신군부가 대통령 재가를 기다리지 않고 집행했고, 사후 재가를 함으로써 12.12쿠데타를 추인하고 말았습니다. 군부의 압력에 굴복한 최 대통령은 전두환 합수부장을 중정부장 서리로 임명해 날개를 달아줬고, 소장 전두환을 대장으로 승진시켰습니다.
군부에게 휘둘린 또 한 명의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윤보선 제4대 대통령입니다. 국회의 간접선거로 당선된 윤 대통령은 내각책임제 하에서 실권이 없었습니다.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5.16쿠데타를 용인하는 듯한 발언과 태도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런 윤 대통령도 당시 군사정부의 정치정화법을 반대해 대통령직을 던졌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집권준비가 끝난 뒤인 1980년 8월 겨우 여덟 달 만에 물러났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재임기간이 가장 짧았습니다. 그의 퇴임 후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2주 정도 권한대행을 했습니다. 체육관선거를 거쳐 전두환이 1980년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전두환은 다시 체육관선거로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12.12와 신군부 집권과정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진술을 요구한 국회와 법원, 그리고 시민여론을 무시했습니다. 재임기간이 짧기도 했고, 12.12와 5.18 등에 대한 책임을 전두환 노태우 중심의 신군부에게 묻다 보니 최 대통령은 역사의 평가에서 비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책임도 반드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