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통해 일본 장군들은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러일전쟁이 일어날 당시 러시아 국력은 일본의 꼭 10배였다. 청일전쟁은 이겼으나 3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내놓게 된 일본으로서는 러시아를 제치지 않으면 더 이상 국가발전은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일본은 무슨 수를 써서든지 러시아에 이겨야 했다. 이를 위해 일본 국민은 국가가 요구하는 모든 힘과 희생을 다했다.
일본이 믿는 것은 영일동맹이었다. 영국은 당시 세계최강이었다. 영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은 것은 1900년 ‘의화단의 난’ 제압에 활약한 무관 등에 인상을 받아 동양의 번견(番犬)으로 믿을 만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 <북경의 55일>에 잘 그려져 있다. 영국은 런던에서 전비 조달을 위한 채권 판매를 지원했다.
미국의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조약을 주선했다. (시오도어 루즈벨트는 2차대전 때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숙부다). 러시아는 아직 싸울 힘이 있었으나 일본은 여력이 없어서 일본 입장에서 강화조약이 더 필요한 때였다.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 등 러시아에서 파국이 일어난 것은 아카시 모토지로 등 일본군 정보장교의 공작도 작용하였다. 이는 영화 <북경의 55일>의 초반에 잘 그려져 있다.
일본군 전술은 돌격 일변도였는데 중국의 난군(亂軍)을 상대할 때는 통했으나 정강(精强)한 러시아에는 통하지 않았다. 특히 여순 203고지 공격에서 올라가는 족족 전사자가 나왔다. 러시아군이 토치카에서 쏘아대는 기관총에 일본의 돌격병사는 수없이 죽었다. 너무 많은 희생자를 내어 군사령관 노기 마레스케 대장은 종전 후 남은 생애를 전사자 유족을 위로하느라 보냈다. 메이지 천황이 죽자 노기 마레스케는 자결하여 일본에서 군신으로 받들어지게 된다.
발트함대가 지구를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렸다. 지브롤터와 수에즈 운하를 거치는 것과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쳐 아시아로 오는 것은 거의 지구 반 바퀴 차이가 나지만 영국이 버티고 있었다. 발트함대는 인도차이나에서 겨우 보급을 하게 되는데 수병은 차라리 도고(東鄕) 제독에 빨리 당하는 것이 좋겠다는 탄식을 하게 된다.
쓰시마해전에서 발트함대는 37척 중 8척이 도주하는 외에 거의 모든 전력이 파괴되었다. 세계는 이를 ‘일본해 해전’으로 부른다. 우리가 이 문제에 관한 한 일본과 겨루기 어려운 이유다.
일본해 해전은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에 잘 그려져 있다. 특히 작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의 역할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도고 연합함대사령장관은 전승 축하연에서 “트라팔가 해전의 넬슨 제독이라면 모르되, 감히 조선의 이순신에는 겨룰 수 없다”고 했다.
일본 국내에서는 전승이 계속되자 내친 김에 모스크바까지 진군하자는 소리도 나왔는데 정확한 정세를 모르는 허황된 소리였다. 대국을 보는 정치가들은 이를 말렸다. 러일전쟁을 통해 장군들은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상공인보다도 군인들이 국가의 기틀이 되었다.
일본이 영국, 미국에 배웠으나 군국주의 독일에 기울게 된 이유가 되기도 한다. 비스마르크가 ‘철과 피’로써 독일을 통일한 것이 1868년 메이지유신보다도 오히려 3년 늦은 1871년이다.
러일전쟁은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메이지유신 후의 일본에 감명을 받은 가장 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