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메이지유신 원훈과 구한말 조선의 엘리트
일본의 西鄕隆盛(사이고 다카모리), 大久保利通(오쿠보 도시미치), 勝海舟(가쓰 가이슈) 등은 메이지유신의 원훈이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쓰마와 조슈의 연합을 성립시켰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메이지정부의 터를 잡았으나 일찍 암살당하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넘겨주었다.
가쓰 가이슈는 사이고와의 담판으로 충돌을 피한다. 그러나 이들을 넘어서는 것은 마지막 쇼군 노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로서 그는 싸우지 않고 막부를 천황에 넘겼다. 분명히 피로 피를 씻는 엄청난 참극이 일어날 수 있었다.
조선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그에 못지않은 인재였다. 갑신정변 실패로 이들 인재를 잃은 것은 조선에 말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이승만은 이때부터 독립협회에서 활약하였다. 김구나 김일성과는 세대와 차원이 달랐다.
민비는 여걸이었다. 아들을 고종을 왕으로 만들고 안동 김씨의 척족 세도에 종지부를 찍은 일세의 영걸이자 대원위로서 10년 넘게 집권한 대원군을 몰아낸 것이 이를 보여준다. 고종은 민비에 비해 형편없는 졸장부였다. 일본군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에 들어간 아관파천은 국왕의 체통을 지키지 못한 말할 수 없는 추태였다.
1895년 6월 6일 일본군은 경복궁에 침범했다. 10월 8일 미우라 고로 등 일본 공사 패거리에 의해 민비가 척살당했다. 김홍집 내각이 성립하여 갑오경장을 실시했다. 이를 갑오개혁이라고 하나 일본의 요구와 필요에 따른 것으로 조선의 국권은 이때 이미 넘어갔다.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까지 15년은 요식행위였다. 1875년 강화도조약으로부터 1895년까지의 기간은 1854년 페리 개항으로부터 1868년 메이지유신까지의 기간과 같다. 이 기간 동안 조선 엘리트가 무슨 잘못을 했던가에 집중해야 한다.
가장 잘못한 것은 고종의 아관파천이었다. 친일파에서 친로파로의 정권 변화였을 뿐이다. 1905년 을사조약에서 민영환의 자결은 조선의 궐기를 촉구한 엘리트의 절절한 호소였다.
1894년 청과 개전하면서 일본은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다. 평택에서 초전 승전보와 풍도 해전의 승리가 전해지자 일본은 기세가 올라 평양전투에서 승리해서 청일전쟁을 결판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