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반일 감정과 인도네시아의 반중 정서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일본군은 13개 사단 규모였다. 그런데 일본군 사단은 전략단위로 통상적인 미군의 사단규모와 달리 2만5천명에 달했다. 지구별로 12개 사단을 두었는데 도쿠가와 막부 당시 번벌(藩閥)의 요충지에 건설한 것이다.
도쿄의 근위사단은 전국에서 모집했다. 조선에 평양 19사단, 나남 20사단을 두고 조선군사령부가 통괄했다. 만주의 관동도독부에 1개 사단이 주둔했는데 만주사변 당시의 관동군은 이 전력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며 북지나방면군, 중지나방면군, 남지나방면군이 생기고 뒤에 지나파견군으로 통합되어 총군이 생겼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조선총독 아들 히사이치가 지휘했다. 총군은 서방의 집단군으로 관동군, 지나 파견군, 남방총군, 본토에 1, 2총군이 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소련군에 대비해오던 관동군이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으로 감축되었다. 관동군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독일대사관에 침투한 소련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의 말을 듣고 스탈린은 만주에 배비하던 전력을 스탈린그라드 방어에 투입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래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다. 스파이가 전쟁에 기여를 한 전형적인 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과 동시에 남방공략이 시작되었는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버마에 4개 방면군이 출정했다. 총 13개 사단에 불과했지만 관동군, 지나파견군에서 엄선된 정예병력이었다. 말레이를 공략한 일본군은 험한 지형을 자전거로 돌파했다. 은륜(銀輪) 부대다. 14군 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항복을 주저하는 영국군 사령관 파시발 장군에게 ‘예스카 노카’로 강박해 유명해졌는데 패전 후 영국군에 붙잡혀 전범재판에서 제일 먼저 사형당했다.
한 영국 장교는 “After Singapore, Asia will never be the same again”이라고 예언했는데, 정확했다.
남방공략 후 인도네시아에서 무진장의 고무와 주석이 쏟아져 들어왔다. 전승기념으로 일황은 소학교 어린이들에게 고무신을 하사했다. 이를 기억하는 원로들이 얼마 전까지 생존했다. 이들에게 일본은 모든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상대이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인식이 뚜렷하다. 고 김종필이 대표적이며 청소년들의 감상적 배일정서를 경계하는 이유다.
종전 당시 관동군, 지나파견군, 남방군이 각각 총군, 즉 집단군이었고 총병력은 7백만명이었다. 조선에서 일본유학생이 학병으로 징집되어 장준하 등은 주로 중국 전선에서 싸우다가 탈주했다. 일본군에 복무한 장도영, 김종오, 민기식, 김용배 등은 건군 원로로 기여했다. 젊은 세대가 친일 인사로 지칭하는 인사다.
사쓰마 위주의 해군은 일본인에게도 폐쇄적으로 조선인을 징집하지 않았다. 건군 원로에 일본 해군 출신이 없고 상선 위주 해방병단이 뿌리가 된 이유다.
한편 수카르노는 2차대전이 끝나고 바로 인도네시아 독립을 선언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화교가 중심이 된 공산당이 유력 장성들을 우물에 빠트려 살해했다. 군부는 공산당을 몰살했는데 이 중에 화교 30만을 찔러 죽였다.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과 화교에 대한 증오는 뿌리가 깊다.
그 정서는 동남아 전역으로 퍼졌다. 화교는 생활에 불편은 없지만, 정치세력이 되지는 못한다. 시진핑의 세계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가 동남아로 퍼져나가기 어려운 이유다.
솔직히 한국의 반일감정과 인도네시아의 반중감정이 같다는건 지랄이고,
인도네시아의 반중감정은 한국의 반중감정과 비교해야할것 같네요.
오히려 인도네시아의 반미반서구감정이 한국의 반일감정과 같다고 봐야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