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英의 對中압박 합작과 ‘신남방정책’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최근 미국과 영국이 합작해 대중국 압박 정책을 펴는 것을 보면, 신남방정책의 길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먼저 90년 전 일본의 만주국 건국 당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1931년 9월 일본은 만주국을 순식간에 만들어내었다. 도발의 원흉은 중좌 이시와라 간지였다. 도쿄의 육군성과 참모본부는 조용했고 오히려 관동군과 연락하며 동조했다.
이런 판국에 내각이 힘을 쓸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시와라 간지는 1만의 관동군으로 23만 장작림張作霖의 봉천군을 기습했다. 이시와라는 이타가키 세이시로 참모장과 협의했으나 혼조 시게루 관동군사령관에는 보고도 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중좌, 대좌들은 자기들 멋대로 국가전략 판단을 하고 행동했다. 이때 관동군은 사단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관동군이 수십만의 대군이 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이시와라는 군의 성패는 氣와 勢이지 숫자가 아니라는 신념에서 행동했다.
일본군은 중일전쟁 병기(兵棋, war game)에서 일본군 1개 대대가 중국군 1개 사단을 상대할 수 있는 것으로 상정했다. 일본도를 휘두르는 만세 돌격에 중국군은 온통 혼을 뺏겼다. 1905년 청일전쟁 이래 중국군은 그 정도 약세였다. 중국인의 공포는 명말明末의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연장이었다.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만주국 조작을 조사하기 위해 리튼 조사단을 보냈으나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일본은 오히려 군제연맹에서 탈퇴했다. 미국은 1차대전 후 영국, 프랑스와 더불어 세계질서의 핵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미국이 빠진 국제연맹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히틀러가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비로소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그러고도 몇 달간 본격적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 ‘가짜전쟁’(phonic war)이 계속되다가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진짜 전쟁에 들어갔다.
프랑스에 대한 침공은 1940년 5월 10일 시작되어 6월 22일 프랑스 항복으로 마무리됐다.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독일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한 것이다. 영국만이 도버해협 밖에서 홀로 남았다.
80여년 전 유럽과 영국, 그리고 1~2년 전 미국을 되돌아 본 이유는 국제사회가 얼마나 냉정하고 계산적인지 상기하기 위해서다.
트럼프는 미국의 힘과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이든에 와서야 비로소 미국은 21세기 중국에 대한 국가전략을 갖추었다. 냉전시대 미국에 의존하던 유럽은 냉전이 종식되자 20세기 초반의 국제연맹만도 못하다. 영국만이 세계적 역할을 미국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날 미국과 영국의 對中압박 합작은 2차대전을 연상시킨다. 신남방정책도 이 바탕위에서 훨씬 쉽게 힘을 받는다. 한국이 이 버스를 같이 타게 된 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