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의 꿈···정치는 모택동, 경제는 등소평?
문화혁명은 중국을 파괴했다. 대표적으로 모택동毛澤東의 뒤를 이은 국가주석 유소기劉少奇가 몰락했다. 몇 번의 곡절이 있었음에도 등소평鄧小平은 살아남았고 결국 패자覇者가 되었다. 모택동 없이는 등소평이 없었을 것이나, 등소평의 개혁이 없이는 모택동도 태평천국의 홍수전洪秀全 같은 역사상 흔한 유적에 불과했을 것이다.
등소평은 모택동을 ‘공7 과3’으로 정리했다. 중국이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미국이 일본을 패망시켰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승리한 것도 장개석蔣介石이 유방劉邦이 아니라 항우項羽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중국공산당 건설의 제일의 공은 모택동에 돌아간다.
등소평 없이는 오늘의 중국은 없다. 중국은 이제 미국과 겨루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1920년대에 한국에서 단편을 쓴 청년들은 전문학교를 나왔다. 일제시대에 전문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큰 혜택을 받은 것이었다. 전남 강진의 김영랑의 생가는 천석꾼이었다. 경춘선의 김유정역은 대지주였던 김유정을 기억해 만든 것이다.
등소평은 주은래周恩來와 함께 노동 유학생으로 프랑스 유학을 했다. 1926년에는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들은 중국의 장려壯麗한 신세대였다.
메이지유신을 일으켜 일본을 열강의 대열에 올린 지사志士들과 같다. 이들의 성공에는 순순히 막부를 양도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1933년 이승만은 미국, 소련, 중국, 한국의 항일연대 설득을 위해 소련에 입국하려 하였으나 소련은 허용하지 않았다.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의 진면목을 소련은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에 대한 이와 같은 차원의 인식을 가진 정치가는 처칠밖에 없다.
모택동은 젊어서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스탈린을 접견하러 그해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이 처음이다. 중공이 승리하기까지 스탈린과 코민테른에 재정적으로 의존하는 바가 많았다. 모택동은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강대국이 흔히 사용하는 외교 술법이었다.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알려주지 않았다. 모택동이 동북연군 출신 3개 사단의 조선 파견으로 한국전쟁에 이미 깊이 간여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지령으로 소련과 중공이 북한과 함께 저지른 것이었다.
시진핑習近平은 2023년 집권 10년이 된다. 등소평 이후 정확히 10년 집권한 장쩌민(江澤民, 강택민)과 후진타오(胡錦濤, 호금도)와 달리 시진핑은 그만한 후계자를 두지 않았다. 왕양王洋이 정치국 상무위원이라지만 그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시진핑의 3선이 점쳐지고 있다. 후계자를 키우지 않은 것이 그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헌법과 같은 무게를 갖는 등소평의 유훈遺訓이 틀어지는 셈이다. 단순히 중국만의 중대한 문제가 아니며 우리에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4년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를 침공하였다. 소련 당시에 우크라이나의 세바스토폴은 흑해 함대의 기항이었으나 소련 해체 후 우크라이나 차지가 된 곳이다. 러시아는 그때를 상기하여 크리미아를 침공한 것인데 서방은 인정하지 않는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보이콧에 중국이 서방에 가담한 것도 중소분쟁과 연관이 있다. 제국의 후예인 러시아는 이런 분쟁 요소를 여럿 가지고 있다. 동북공정을 꾸미고 있는 중국이 북한 급변사태 발생 시 개입하는 것도 이같은 양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