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나라는 그 나라 국민 수준에 맞는 정치를 갖는다”

2차대전 종전 한달을 앞두고 열린 포츠담회담에 참석한 영국의 처칠 수상. 그가 남긴 “모든 나라는 그 나라 국민 수준에 맞는 정치를 갖는다”는 말은 명언 중의 명언이다. 처칠 오른쪽으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이 보인다. 

1440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사용하는 인쇄술을 독일에 퍼뜨렸다. 그때까지 사제만 읽던 성경을 평민도 읽게 되었다. 당시 성경은 필사본이어서 비싸고 구하기가 힘들었다. 평민도 성경을 읽게 되니,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근세의 시작이다.

한반도에서는 이보다 먼저 고려의 1377년 금속활자가 만들어졌다.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강화도에 보관되어 있다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에 침탈되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것이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의 노력에 의해 영구임대 형식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며, 2001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여기에는 노태우 대통령과 미테랑 대통령의 TGV 지하철 선정을 둘러싼 정상회담도 영향을 미쳤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프랑스에는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침탈한 해외문화재가 수없이 많다. 원래의 보유국이 달라고 해서 준다면 거덜 난다. 이것은 영국의 대영박물관도 마찬가지다. 이를 둘러본 이상규 장군(육사 12기)은 거대한 도굴창고라 불렀다. 서울대 사학과에서 위탁교육을 받아 보는 눈이 남달랐다.

근대 일본에서는 이조백자가 유명했다. 제후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엄청난 값을 주고 샀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특명으로 조선에서 많은 도공이 잡혀갔다. 그들은 대대로 일본에서 살았다. 14대 심수관이 유명하다.

일본이 조선에서 쫓겨 가게 된 공(功)의 70%는 이순신이다. 나머지는 의병이 20%, 명의 원병은 10%라 볼 수 있다. 조선에서는 명의 원군을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 하여 고종까지 원군을 보낸 신종(神宗)에 제사를 지냈다. 왕실을 구한 것은 맞으나 조선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백성은 원병을 뒷받침하느라 끊임없이 시달렸다. 조선은 그때 망했어야 했다.

선조는 서자(庶子)로 적자(嫡子)가 아니었다. 이는 나라의 운세가 쇠잔하였다는 징조였다. 조선 왕조에서 적자 장손이 왕위를 얻은 것은 불과하다.

이 불행의 징조는 이성계가 후비의 막내를 세자 삼으려 했을 때부터 일어났다. 방원의 난으로 왕실이 풍비박산 나지 않았던가? 그 방원이 태종이 되어 성군(聖君) 세종대왕이 나온 것은 기묘하다. 그런가하면 암군(暗君) 선조시대에 민족을 구한 성울(聖雄) 이순신이 나온 것은 천운이다.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과 선조의 明(명)으로의 이동을 만류한 이항복도 보기 드문 훌륭한 재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임진왜란의 국제정치적 의미다. 독일에서는 1618년부터 30년간 계속된 30년전쟁이 일어났는데 후일 중세의 세계대전이라 불렸다. 임진왜란에서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몰락하고 도쿠가와 바쿠후(덕천막부, 德川幕府)가 들어섰으며 중국에서도 明이 쇄락하고 淸이 흥기하게 되었다. 청의 8기군은 6만에 불과한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청 태종의 병력 운용이 놀라왔는데 조선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서 나라가 지속된 기간은 평균 200년이다. 1392년에 나라가 세워진 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정확히 2백년을 맞고 있었다.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로 수많은 인재가 주살(誅殺)되었다. 선비는 왕실을 보위할 뿐 아니라 나라의 보배다. 조선에서 인재를 아끼지 않는 버릇은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다.

중구난방의 대통령 후보 중에 용도에 따라서 당대가 아니면 후대라도 쓰일 만한 인재들이 있다. 국민들은 잘 가려야 한다. 처칠은 “모든 나라는 그 나라 국민 수준에 맞는 정치를 갖는다”고 했다. 명언 중의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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