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 30년 저항한 고려, 청에 졸지에 항복한 조선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조선 왕실에서 거두는 공물貢物의 절반이 성균관으로 나갔는데 학비와 숙식, 용돈도 지급했다. 이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려는 조선의 국가적 관심과 정성이 쏟아진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역으로 조선의 재정이 얼마나 보잘 것 없던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 중국과 비교하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중국은 문자 기대로 지대박물地大物博의 나라였다. 중국의 국세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잘 나와 있다. 소주, 항주의 경제는 실로 막대하여 제노아 등 유럽의 도시국가 상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마르코는 별명이 ‘백만‘이었다고 한다.
이때 송宋이 금金에 쫓겨 내려왔는데 송이 금에 바치는 세폐歲幣만 해도 엄청났다. 송의 재상 진회秦檜가 금에 굴종하는 것은 중국인들에 말할 수 없는 국치였다. 진회의 모함에 걸려죽은 악비岳飛가 충신의 전형으로 숭상되었다.
조선에서는 악비를 충신의 모범으로 존숭하여 한漢의 관우關羽를 함께 모시는 관악묘關岳廟를 세웠다.
중국에서도 악비를 ‘중국의 이순신’이라고 하여 구국의 영웅으로 모신다. 송의 정호程顥, 주희朱熹의 성리학이 번성한 여건은 이랬다. 조선은 주자의 일자一字 일획一劃도 고치지 못한다는 송시열宋時烈의 시대였다. 심지어 임진왜란에서 의주義州까지 쫓겨 온 선조를 명이 구조한 것을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 불렀다.
송은 중국 역사상 가장 약한 나라였다. 몽골은 금에 밀려 남으로 내려간 송을 멸망 시켰다. 쿠빌라이는 금을 멸망시키고 원을 세웠는데 당시의 세계제국이었다. 교통·통신에 쓰이는 말이 전국에 20만필이었고 큰 도시에는 만필 이상이 있었다. 모반이 있다든가 급한 전갈이 있을 때에는 밤낮을 쉬지 않고 하루 2백마일 이상을 달릴 수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10일 이상 걸릴 지방으로부터의 정보를 이틀 밤낮에 들을 수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당시 대원제국을 이처럼 자세히 그릴 수 있었다. 고려가 이러한 몽골에 30년 가까이 저항한 것은 조선이 청에 졸지에 항복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성계의 조선은 유교 중심 국가였다. 조선이 성균관에 들이는 정성은 지극 정성이었다. 세자부터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 학생들이 조정에 항거하는 완강한 비판도 있었지만 수용했다. 선비의 기를 북돋운다는 것이었다.
1965년 대학생들이 청구권 자금으로 근대화의 밑거름을 삼으려는 정부에 저항하자 김종필 등의 5.16 주체세력은 계엄령 선포로 이를 돌파했던 양태와 기본적으로 다르다. 군부와 민간 엘리트는 체질부터 달랐다. 실질과 능률을 중시하는 일본과 미국의 군사로부터 배운 군부에 비해 조선의 선비와 같이 형식과 명분을 중시하는 민간은 화해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