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일본의 닉슨 쇼크와 2021년 미중관계 속 한국
세계가 중국과 수교하기 위해서는 ‘중국은 하나’라는 원칙을 수용해야 한다. 이는 대만, 중화민국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만은 아직도 엄연히 실존하고 있다. 대만의 국민당은 대만을 기반으로 대륙을 회복하고자 하고 있다. 민진당은 대만이 중국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한다.
근세에 들어 서양 함대에 타이완 즉 Formosa는 중국 즉 China와 따로 알려졌다. 1895년 청일전쟁에 패배하여 대만은 일본 식민지가 되었으며 이래로 일본과 교유가 잦았다. 일본은 1972년 중국을 전격 방문한 닉슨 쇼크 이후 중국과 수교하였다.
일본은 대만의 독립을 수용하지는 않았으나, 대만 대표부를 따로 두었다. 여기에 따라 대만도 친일도 반일도 아닌 우일(友日)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심지어 2007년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였다.
한국은 20년 늦게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으로 1992년 중공과 수교하였다. 미국은 1979년 중국과 수교하였다. 1978년 등소평(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획기적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세계는 미국, 소련, 중국의 3각 구도가 되었다. 1969년 소련과 중공은 국경분쟁을 치렀다. 당시 중소분쟁에 대한 정보는 제한적이었는데 냉전이 종료되어 여러 경로로 당시 상황이 밝혀졌다. 지금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과는 달랐다. 다만스키에 침입한 중국군은 몰살당했다. 1939년 노몬한에서 일본 관동군이 당한 참극의 재판이 되었다. 중국은 공황에 빠졌고 미국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키신저의 핑퐁외교는 매스컴의 관심을 끈 한 소극이었을 따름이다.
중국은 다시 월남과도 국경분쟁을 겪었다. 1979년 중국은 월남을 침공하였으나 월남에 일패도지(一敗塗地)했다. 등소평은 한수 가르쳐주겠다고 들어갔으나 망신만 당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월남은 프랑스, 미국에 이어 중국을 물리쳤다. 월남을 방문한 국방부 대표단에 “중국과 월남은 고래로 중국과 상극이었다”고 하며 한국에 각별한 우의를 밝혔다. 삼국시대에 세 번 잡았다가 세 번 풀어준 맹획(猛獲)의 이야기가 이를 보여준다.
지금 한국은 중국에서 철수한 공장을 베트남으로 옮기고 있다. 베트남전을 치른 한월관계는 각별해지고 있다.
수교이후 미중 경제관계는 급증했다. 값싼 중국 제품에 대한 미국인이 기호가 폭발했다. 이제 중국의 불공정 무역에 대한 우려가 심각해졌다. 바이든은 “중국은 21세기 미국에 대한 최대의 위협”임을 공언하였다. 대중 포위망은 급속히 강화되었다. 아프간 철군은 그 일환이다.
미국, 영국, 호주의 연합(AUKUS)이 중국을 포위하여 프랑스가 항의하고 있다. 서방의 추밀(樞密)한 동맹이면서도 파이브 아이스와 AUKUS에 제외하는 것에 불만이다.
1983년 미국 레이건은 그레나다를 침공하면서 보안상 우려된다고 대처의 영국에 감추었다. 대처 수상은 격노하였다. 프랑스는 국가전략의 이런 기본도 아직 몰랐단 말인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은 위치를 잘 잡아야 한다. 미국, 영국, 호주 연합에 뒤떨어져는 안 된다. 여기에 낙후되는 것은 마치 일본이 1970년대의 닉슨 쇼크를 잡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외교체제도 여기에 즉응할 수 있는 체제가 되어야 한다. 이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국 전문가를 등용해야 한다. 그보다 이들을 분간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춘 현인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