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진공 상태’ 박노해

“여름에는 풀이 나는 게 아니라/ 풀이 쳐들어온다/  빈 공간을 사정없이 침투하고/  무참하게 진군해 온다” 

여름날 아흐레쯤 집을 비웠더니
밭에도 흙마당에도 풀이 가득하다
풀을 뽑다 돌아보니 어느새 풀이 돋아난다

여름에는 풀이 나는 게 아니라
풀이 쳐들어온다
빈 공간을 사정없이 침투하고
무참하게 진군해 온다

자연에는 진공 상태가 없다
사회에는 백지 상태가 없다
권력에는 순수 상태가 없다

이념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
혁명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
전위가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

네 가슴과 머리에 무엇이 침투하는가
네 꿈과 열정에 무엇이 쳐들어오는가
네 삶과 일상에 무엇이 점령해오는가

자연에는 진공 상태가 없다
사회에는 진공 상태가 없다
정신에는 진공 상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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