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과거사①] 금주법·모짜르트·레논·역도산

존 레논

[아시아엔=김중겸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경찰청 전 수사국장] “술이다!” 미국인들 환호했다. 1800년대 중반, 산업혁명=>공업화 성과 나타났다. 중산층 부르주아가 자리 잡았다. 발언권 행사했다.

“검소하게 살고 돈 모아서 잘 살아야지, 쇠털같이 허구한 날 술이나 먹어서야 되겠냐.” 노동자계급이 못마땅했다.

마침 불어 닥친 복음주의 운동에 따르면 음주=죄였다. 특히 일요일=주일에 술 마시다니! 아일랜드인과 독일인의 습관이 꼴불견이었다. 1920년 금주법 시행했다.

술꾼들은 1월15일 자정까지 ‘합법적인 술’을 입에 부었다. 1월 16일, 이날부터는 밀주(密酒)다. “쉬, 쉬. 조용히 마셔.”

1만5천개 술집이 3만2천개로 오히려 증가했다!

마피아는 밀주로 돈 벌었다. 조직은 강성해졌다. 착한 서민들은 초범도 벌금 1000달러에 금고(禁錮) 6개월에 처해졌다.

1933년, 14년만에 금주법 해제됐다. 12월 5일이었다.

금주법 관련 슬랭

speakeasy; 밀주 밀매주점. blind pig, blind tiger라고도 한다. 단골만 암호 대고 출입했기 때문.

bootlegger; 밀조-밀수-밀매 업자. 장화(boot)에 술 숨긴 사람. 원래 선원들이 밀수품 숨긴 긴 가죽구두.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게 왁스를 칠했다. moonshiner라고도 했다. 달빛 아래서 위법행위 하는 사람. 밀수담배는 bootleg cigarette.

rum runner; 주류 밀수업자-밀수선박. 이들에게 영해 밖에서 밀주 공급하는 고속보트는 rum row. 밀수범의 밀주 가로채는 자는 hijacker.

bathtub jin; 집에서 증류한 자가소비용 진.

needle beer; 맥주에 바늘로 공업용 알코올 넣은 맥주. 일종의 독맥주다.

치로 테라노바

치로 테라노바(Ciro Terranova)는 식용식물 아티초크를 독점해 수입가의 3배로 판 일명 Artichoke king으로 불렸다. 뉴욕 이탈리아지구에서 수백명 고용, 밀주 만든 밀주세계 왕이었다.

모짜르트


모차르트

1791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35년의 짧은 생애를 막 내렸다. 허무하게 죽자 독살 소문 나돌았다.

러시아 문호 푸시킨 역시 38세 단명한 삶 살았다. 1830년 궁정작곡가 살리에리가 라이벌 모차르트 독살했다는 내용의 글 썼다.

1898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를 토대로 오페라 만들었다. 1979년 피터 셰퍼는 희곡 <아마데우스>를 썼다. 독살설 퍼지게 만들었다.

살리에리와 친하게 지냈던 베토벤의 노트에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 독살했다는 소문이 빈에 나돌고 있다”는 메모 남겼다.

모차르트 다음의 ‘2인자로서 고민하는 살리에리 증후군’에 시달렸다고 독살했다?

모차르트 사망대장엔 ‘12월 5일. 사인은 좁쌀모양의 붉은 점 나오는 열(熱)’로 기록돼 있다. 독자께선 독살파? 혹은 병사파?

비틀즈, 그들은 모두 존 레논이었고, 링고 스타였으며 폴 매카트니였다. 그리고…

레논

1980년 12월 8일 밤 10시 50분 아파트 입구에 총성 다섯 발 울렸다. 등에 네발 맞았다.

응급요원이 물었다. “Are you John Lennon?” “Yes…….”가 유언 됐다. 사망 당시 40세. 레논 돕다가 피 묻은 아파트 수위의 셔츠는 3만1천 파운드에 팔렸다.

총 쏜 자는 마크 데이비드 채프맨(Mark David Chapman). 25세. 경찰출동 기다리며 <호밀밭의 파수군>(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著) 읽고 있었다.

나의 살인은 소설 주인공의 반항과 같은 행동임을 암시했다. 덕분에 이 책 <호밀밭의 파수군> 잘 팔려나갔다.

레논 자기가 “more popular than Jesus”(예수보다 유명하다)고 말하다니 언어도단이다, 방자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채프맨은 말했다.

그는 “하와이에서 부랴부랴 죽이러 왔다”고 했다. 20년 복역 후 가석방됐다.

역도산

김신락-역도산

1946년 23세, 함경도 태생 김신락(金信洛)이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선수가 됐다.

1950년 27세, 외국인은 스모선수의 챔피언 요코즈나(橫綱) 되지 못한다는 규정 알게 됐다. 그만뒀다. 마침 주일미군 위문 왔던 미국인 레슬러에게 발탁되어 미국으로 갔다. 기량과 감각 익혔다.

1953년 30세. 흥행권도 획득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마침 텔레비전 방송 시작한 해였다. 2월 19일 첫 시합. 경기장과 옥외TV 앞엔 중계 보려고 난리쳤다.

2차세계대전 패전으로 우울했던 일본인들은 역도산(力道山) 리키도상이 미국인 이기는 장면에 열광했다. 적자 보던 N-TV는 흑자로 돌아설 정도였다.

1963년 야쿠자가 스모, 연예계, 스포츠 흥행 쥐락펴락한 시절. 그해 12월 8일 그들 싸움에 휘말려 칼 맞았다. 12월 15일 사망. 40세.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