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과거사②] “왕관이냐 사랑이냐?”···영국 에드워드8세와 심프슨 부인

심프슨 부인과 에드워드 8세

[아시아엔=김중겸 전 충남경찰청장, 청와대 치안비서관 역임]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줄곧 부국강병(富國强兵) 전쟁의 길로 나아갔다.

1937년 노구교(蘆溝橋,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 일으켰다. 7월 7일이다. 이어 12월 13일 남경(南京, 난징) 점거했다. 약탈은 기본이었다.

남녀노소 불문 쏴대고 생매장하고 태워 죽였다. 남성은 산채로 총검술 훈련용으로 사용하고 여성은 강간하고 살해했다. 독일의 나치조차도 “야수의 행위”라 했다.

난징시민 70만 중 30만 죽었다. 그 때 일본 <도쿄일일신문>은 “중국인 목배기 시합에서 106명 벤 소위가 1등 했다”고 사진과 더불어 보도했다.

“사수하겠노라” 외친 장개석(蔣介石, 장제스)는 12월 7일, 군 수뇌부는 12일 목숨 보전 위해 먼저 도주했다.

전쟁책임 어물어물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Pearl Harbor)을 공격했다. 왜 8일인가 진주만은 7일 일요일 함대가 쉬기 위해 항만에 집결해 있을 가능성 많았다. 일격에 폭격효과 거양(擧揚)!

게다가 보름달 지난 후 나흘째, 들킬 우려보다는 폭격기와 호위기 안전, 이착륙에 유리했다.

이길 듯했던 전쟁이 패착 되고 말았다. 아직도 그들은 왜 원자폭탄이 투하됐는지? 그 원인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 “억울하다”는 인식만 주입시킨다.

1948년 12월 23일 A급 전범 7명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됐다. 전범대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소령 시절부터 “만주는 내 꿈의 땅”이라 한 전쟁광이다. 참회는커녕 아미타불 곁으로 간다는 유언 남겼다.

전쟁 재가하고 보고받았던 자, 히로히토(裕仁) 천왕은 1926년 12월 25일 즉위했다. 재위기간이 곧 전쟁역사다. 히틀러, 무솔리니와 함께 3대 전범이다. 그가 총책임자라는 증언과 증거를 미국인들이 외면했다.

왕관이냐 사랑이냐

제1차대전 치른 영국은 국력이 쇠약해졌다. 전쟁에 협력한 식민지와 자치령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있었다. 세계 최고 강국자리는 미국 차지가 됐다.

1936년 부왕이 죽자 에드워드 8세로 왕위에 오를 참인 황태자는 미국여성과 결혼할 작정이었다.

나라가 이렇게 약해져 가는 때 하필 미국사람 게다가 이혼 전력 있는 유부녀하고 결혼한다? 정치권이 맹렬하게 반대했다. 국민들은 “별난 왕이 다 나오네” 하며 실망 컸다.

왕과 결혼하려고 10월 27일 한번 더 이혼한 여인, 심프슨은 12월 3일 도망치듯 프랑스로 떠났다.

12월 11일 밤 10시, 왕위 포기한다고 라디오 통해 말했다. 윈저공으로 격하되고 두 사람 결혼했다. 유럽대륙에서 외롭게 살았다.

고국 영국에 좀 가려고 해도 “Oh! No!” 1967년에야 공식방문 허용됐다. 31년 만이었다.

구사일생

1849년 봉건 구체제 전복하자는 혁명사상가 서클에 참가했다. 검거선풍 불었다. 1849년 29세에 체포돼 반역죄로 사형.

12월 22일 총살형 집행일. ‘곧 죽는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죄 사함 받을까?’ 만감 교차했다.

돌연, 황제의 특사 도착해 특별사면 알렸다. 시베리아 징역형 4년에 군 복무 4년으로 대체됐다. 이 체험이 <백치>(白痴), ‘죽음의 집의 기록’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죽음과의 대면, 그 공포감은 아마도 그의 모든 세포를 뒤집어 놨을지도 모른다. 그 뒤 전과자와 어울려 도박에 빠졌다. 지병인 간질도 악화돼 평생 고생했다.

그런 가운데 대작 <좌와 벌>과 <악령> 써나갔다. 나이 오십 되어서야 생활의 안정 찾았다. 그 무렵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도 발표했다. 1881년, 60세에 객혈하며 처자가 보살피는 가운데 눈 감았다. 누구일까? 다 아는 사람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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