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의 東北亞] ‘라쇼몽’을 통해 본 中·日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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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가 감독한 영화 라쇼몽 포스터. 제15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라쇼몽은 일본 헤이안시대의 수도였던 교토의 남쪽정문이다.

중국학생들 문학 작품 계급투쟁 관점으로만 인식

일본근대문학 거장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 1892~1927)의 처녀작 <라쇼몽(羅生門)>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생전에 뱀 말린 것을 마른 생선으로 둔갑시켜 팔아먹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한 여성이 라쇼몽 노상에 시체로?버려졌다. 집 주인한테 쫓겨난 하인이 을씨년스럽고 공포에 짓눌린 이 거리에서??한 노파가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을 목격한다. 사내는 시체의 머리카락이 뽑혀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속에 있던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와 함께 노파에 대한 증오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 증오는 단순히 노파에 대해서만 느끼는 증오가 아니었다. 세상에 있는 ‘악’이란 악, 모두에 대해 느끼는 강한 반감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때 누군가가 이 사내에게 얼마 전까지 고민하고 있던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 굶어 죽을 것인가,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둑이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물어본다면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굶어 죽을 것’을 택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이 사내는 악에 대한 증오가 불을 붙인 소나무 장작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굶어 죽을 것인가, 도둑질을 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을 일순간에 없애버리게 된 것이다. 마음속에서 갈등하던 굶어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깊게 의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과연 그럴까!”

사내가 노파의 행위에 분노해 꾸짖자 노파가 태연스레 대답한다. “내가 하는 짓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안하면 굶어죽게 되니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생각 밖의 말을 듣고 난 사내는 노파 앞으로 성큼 다가가서는 얼굴의 여드름을 만지고 있던 오른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쥐면서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당신의 옷을 벗겨 빼앗아가도 원망하지는 않겠군. 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될 테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이 작품은 일본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공인 받은 명작이 됐고 영화, 뮤지컬 등으로 창작돼 관객의 호평을 받아왔다.

일본인은 다층적 맥락 분석 통해 인간 이해

필자는 장춘에서 공부할 때 일본 교수로부터 이 작품에 대해 수업 받은 적이 있다. 교수는 전쟁과 기근, 지진, 태풍 등에 시달려 온 과거 헤이안시대(平安時代)의 어둠이 작품의 배경으로 된 점을 주력해서 설명했다. 이어 등장인물들의 감정 강의에 몰입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만약 내가 그 하인이었다면?”라는 숙제를 남겼다.

세상에 이런 수업이 다 있나? 다시 말해 모든 작품을 그 당시 역사나 사회문화배경과는 전혀 상관없이 계급투쟁의 관점으로만 인식하고 분석하는데 길들여진 우리 중국학생들의 머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업이었고 실로 충격적이었다.

특히 마지막 “만약 내가 그 하인이었다면?”의 숙제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회주의 중국은 선생이든 학생이든 일제히 악을 반대하고 선을 제창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끝이다. 이런 맥락에서 <라쇼몽>은 더 말할 것 없이 악투성이여서 악에 대한 증오감을 호소하고 정의를 외치면 되는 것이지 뭔 뚱딴지같은 “만약 내가 그 하인이었다면?”인가?

이것이 바로 일본과 중국이 문학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차이다. 즉 일본은 인간이 처한 환경에서의 인성에서 답을 찾으려 하는데 비해, 중국은 인성을 논하는 것은 썩어빠진 사상과 이념으로 취급하고 무작정 모든 인간은 계급적 낙인이 찍혀 있다는 계급투쟁의 관점으로만 두들겨 맞추다 보니 모든 작품의 진실이 왜곡되어 있었으며 우리는 그 왜곡된 허상을 머리에 입력하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강산이 세 번 바뀌었을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일본교수한테서 <라쇼몽>수업을 받은 것이 정말로 감명 깊게 느껴진다.

“만약 내가 그 하인이었다면?”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세상살이하는데 있어서 어쩌면 영원한 주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필자의 가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개개인은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서 부딪치는 일들에서 “만약 내가 그 하인이었다면?”라는 문제설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그럴 때마다?선택을 요구받게 된다.

직장 상사나 동료 혹은 친구가 비합법적 혹은 비합리적인 수단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회사 오너로서 타회사가 불법게임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데 나는 정당한 길을 걷고자 하기에 망하게 된다면? 현재 중국정부 관리와 공기업관리들의 부정부패 문제가 따지고 보면 악행의 환경에서 나 홀로만 깨끗할 수 없다는 심리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화대혁명은 중국인을 괴물로 만들어”

굴원이 절망에 빠져 멱라강 강가에서 헤맬 때 한 도사가 나타나 “당신은 세상 사람이 다 술에 취해 혼탁한데 홀로 맑게 살려니 어이 될 말인가!”고 지탄한다.

부모형제의 악행을 목격하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출국한 남편(아내)이 바람났다고 나도 집에서 맞바람을 피워야 하나?

<라쇼몽>에 “만약 이 지구 수억 명의 인간이 다 괴물로 변한다면 그 다음날부터 곧 괴물들 사이 생존경쟁이 일어나겠지!”라는 대목이 있다.

이 한 마디 말이 곧 작품 속 인물들은 악행을 인간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합리화하고 있다는 에고이즘을 암시하고 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황하대륙의 인간을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무당 알곡산량이 수만 근이 되고, 시골에서 수백수천 톤의 강철을 생산하고, 비옥한 토지를 깊이 갈아엎어 생땅이 드러나 농사를 망치게 하는 심경운동, 굽이 흐르는 강을 혁명은 직선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보조에 맞춰 곧게 흐르게 만드는 공사 등은 모두 괴물적인 행위였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 똑똑했던 당정간부들이 무당 알곡산량이 얼마인지, 시골에서는 강철이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 땅을 깊이 갈아엎으면 수확이 떨어진다는 사실, 자연의 섭리에 의해 세상의 모든 강은 굽이 흐른다는 것 등을 몰랐을까? 절대 아니다! 세상이 인간을 괴물로 만들고 있는데 나만 괴물이 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니깐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해 양심을 버리고 허위를 부르짖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당시에 고지식하게 진실을 주장한 사람들은 억울하게 반혁명이란 감투를 쓰고 한생을 망쳐 먹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사람들이 이지를 상실하고 괴물이 되어 부모형제, 친구, 스승과 제자 사이 반목하며 인성을 짓밟혔던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황하대륙에서 이상하게 조선족사회만 아직도 괴물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족사회만 아직도 무슨 분자라는 감투를 씌우려 애쓰고 타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툭하면 괴물의 몽둥이로 두들겨 패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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