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 스님 3주기] “총통 각하!”···안개산(霧山)의 다섯 얼굴
<아시아엔>은 5월 26일, 시조시인이자 선승으로 생을 마감한 설악 조오현 스님 3주기를 맞아, 스님을 추모하는 각계인사들의 글을 몇 차례 나눠 싣습니다. 이 글들은 2019년 5월 시인 김병무·홍사성이 엮어 낸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에 실린 것들입니다. <편집자>
총통각하(總統閣下)
[아시아엔=이근배 예술원 회장, 중앙대 초빙교수] 나는 산을 모른다. 살아서는 내 뵈올 길 없다고만 마음 했던 겨레의 영산(靈山) 백두산 천지를 일곱 번이나 근참(覲參)했어도 그 천변만화, 불가사의를 어찌 이를 수 있으랴. 송나라 소동파(蘇東坡)던가 명나라 주지번(朱之蕃)이던가,
“내 고려 땅에 태어나서 금강산 한번 보았으면(願生高麗國一見 金剛山)” 하고 노래했다는 금강산을 네 번이나 발걸음 했어도 산을 보았다고 할 수가 없으니 그렇다.
어디 백두, 금강뿐이겠는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라도 산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늘 하물며 짙은 안개로 몸을 가린 산의 얼굴을 누가 보았다 하겠는가. 그런데 부처님의 가피(加被)신가. 공양미 머리에 이고 수덕사, 개심사, 마곡사, 갑사로 불공 다니시던 할머니의 공덕이신가.
반세기 저쪽 내 서른 살 때 스님 시인 무산(霧山) 조오현을 만난 것이다. 저 1960년대 초·중반만 해도 시조단은 영성(零星)하기 그지없었다. 1964년 12월 30일 한국시조작가협회 창립 때 스무 명 남짓하였으니 시조에서 신인 하나가 탄생하는 것은 크게 주목을 받을 때였다.
조오현은 산도 아니었고 더욱 안개산은 아니었다. 1968년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했을 때는 그저 조오현 시인이었다. 설악무산의 자호(自號)를 쓰기 시작한 것은 훗날 설악산 신흥사 주지로 주석(駐錫) 하면서부터이다.
한국시조작가협회는 뒤에 한국시조시인협회로 이름이 바뀌었고 총회며 야유회가 있을 때 전국에서 회원들이 거의 참석했다. 자유시에 비해 수적으로 10분의 1의 열세였기에 더욱 응집력이 컸던 것 같다. 조오현은 언제나 김정휴 시인과 붙어 다녔다. 김정휴는 기골이 장대하고 눈이 부리부리해서 율 브리너 같았는데 그에 비해 조오현은 꼬장꼬장한 스님티가 역력했다.
1970년대 들어서부터인가, 우리는 그 두 분을 정휴당(正休堂), 오현당(五鉉堂) 하고 집 당(堂) 자를 붙여서 불렀다. 시조단뿐만 아니라 문단에서 나는 비교적 두 당(堂)과 가까웠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정휴당이 오현당을 총통(總統)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총통이라면 대만에서 장개석 이름 뒤에 붙는 우리나라의 대통령 격인데, 스님이자 시인인 조오현에게 한 나라 최고 권력자에게 주는 칭호를 왜 정휴당은 쓰는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한 번쯤 물어볼 만도 한데 나는 그저 그럴 까닭이 있으려니 하고 흘려만 버리고 있었다. 그 총통각하께서 열반하시매 아하! 나는 왜 총통각하!라고 불러보지 못했을까 하는 뉘우침이 따른다. 그렇다. 안개산의 하나의 얼굴은 ‘총통각하’였다.
절대 권력자의 아우라와 위엄이 있고 그 안에는 만백성(중생)에게 은혜와 복락을 베푸는 원력이 있음이라. 정휴당은 그 부리부리한 율 브리너의 눈으로 일찌감치 꿰뚫어 보았었구나. 선승(禪僧)으로 큰 시조시인으로 무산의 무량한 내공을.
사화집 《심우도(尋牛圖)》
금오산(金烏山)은 구미시, 칠곡군, 김천시의 경계에 걸쳐 있는 산인데, 구미시 남통 동쪽 금오산 마루에 해운사(海雲寺)가 있다. 1973년 겨울, 그 절 주지로 계신 조오현 시인을 만나러 갔었다. 까닭인즉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직을 놓고 나의 은사이신 김동리 선생과 《현대문학》 주간인 조연현 선생이 나라를 두 쪽 낼 것 같은 대전을 벌였는데, 어느 날 이문구가 나를 찾아와서 시조분과 회장으로 나가달라는 것이었다. 장순하, 이우종 두 분이 이태극 선생의 뒤를 잇는 시조분과 회장에 출마했는데 모두 조연현 깃발을 들었으니,
당선은 어렵겠지만 김동리 선생 쪽에 누구라도 이름을 걸쳐야 하지 않겠느냐는 설득에 나는 덜컥 대답하고 말았다. 그래서 표가 많은 대구에 가서 이호우, 이우출, 배병창 등 ‘낙강’ 동인들을 만나고 거기 군부대에 근무하는 이상범 소령과 해운사에 한표 얻으러 간 것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금오산을 오르니 시골 큰 대감댁 행랑채만큼이나 작디작은 절이었다. 그래도 보리 섞인 밥에 짠무 김치로 맛있게 공양하고 눈 쌓인 산을 등반했었다. 주지 스님은 천원 한 장 노잣돈도 안 주셨어도 절집은 가난하려니 했었다.
서울 저잣거리에서가 아닌 눈 쌓인 겨울 해운사 탐방은 돌아보면 아주 맑고 따뜻한 마음속의 그림이었다. 그리고 서너 해쯤 지났을까. 오현당이 설악산 신흥사 주지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해운사의 오두막 절에 인상이 깊었던 터라 신흥사도 그리 큰 절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1978년 어느 가을날, 오현당께서 사화집 《심우도》 원고를 들고 북창동 한국문학사로 찾아오셨다.
백수(白水) 정완영 선생 시집도 세 번째까지 내 손으로 꾸며드렸거니와 《한국문학》이라는 잡지를 하고 있었고, 더욱 그간 정도 들었던 터라 여러모로 내게 맡기는 것이 편했으리라. 몇 자 발문도 쓰라는 말씀에도 덥석 대답하고 시고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몇 번이나 눈을 씻고 또 씻었다. 본래 속 빈 강정이 겉넘기만 능사이지만 산승(山僧)이 쓰는 시조가 그저 그러려니 했던 게 전혀 틀린 것이었다. 어디 문예창작과나 국문과를 다닌 것도 아닌데 깊은 산사에서 독경이나 하고 절 살림하는 주지의 신분인데, 어디서 이런 읽어낼 수 없는 글자들을 쏟아내? 그때라도 좀 더 눈 밝고 귀 밝은 이들에게 발문을 넘길 것을 에라 모르겠다 하고 책 뒤에 붙여냈으니, 이 부끄러움을 어찌할꼬! 다만 당대 최고의 서가(書家) 일중(一中) 김충현의 제자에다 포(布)크로스 은박 하드커버에 케이스까지 지금 봐도 당시 시집으로는 크게 뒤지지 않게 책을 꾸며드렸음이 한편 다행스럽다.
토함산 불국사 통일대종
설악산 신흥사를 떠나 아메리카에 가선 영어라고는 ‘디시 워시(dish wash)’ 한마디만 익혀 온 무산 큰스님이 다시 신흥사를 찾는 권토중래를 모색하며 〈법보신문〉 편집국장,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법필(法筆)을 휘두르던 1987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광화문의 친구 사무실에서 품삯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아시고서 총통께서 찾아오셨다.
반갑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꽤 두툼한 흰 편지봉투를 불쑥 건네주신다. 토함산 불국사에서 통일대종을 주성한다는데 거기 종신에 새길 명문(銘文)을 원고지 5장만 써보라는 말씀이셨다. 200자 원고지 5장에 50만원이면 한 장에 10만원이니 나로서는 높은 글값이었다.
뜻밖의 과분한 선 고료를 받았으면 다방에라도 모시고 가서 차 대접도 하며 근황이라도 여쭐 일인데, 나도 그렇고 총통께서도 바람처럼 훌쩍 가셨다. 서울올림픽을 기념하여 짓는 성덕대왕신종보다 2배 크기의 세계 최대의 범종에 새길 글을 지으라고? 원고료를 받았으니 써보긴 해야겠는데 불교라는 높은 산 깊은 강을 내 어찌 넘겨다볼 줄 알겠으며 무딘 솜씨로 쓸 줄 있으랴. 어름어름 몇 자 써서 갖다 드렸었다. 한달쯤 지났을까, 총통께서 다시 찾아오셨다. 이번에는 아주 두툼한 봉투를 내미신다. 내 어쭙잖은 글이 합격(!)이란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나 2백만원을 손에 쥐었으니 그저 감읍할밖에.
사연은 이랬다. 1차로 문단, 학계, 언론계의 노대가들에게 원고청탁을 했었는데 모두 부적합 판정이 나서, 제2진으로 청탁할 때 총통께서 내 글솜씨를 믿고 명단에 넣은 것이 아니고 글값이나 챙겨주려 했던 것이 황소가 뒷발로 우렁이 잡듯이 당선작이 된 것이다. 총통께서도 속으로 흡족하셨을 것이고 나 또한 총통의 체면을 세워드린 것이 기뻤다.
그 종명이 소문이 나서 불교방송 개국 모연문, 개국식 발원문, 개국 기념탑 비문 등을 비롯해 큰절의 불사에 글 심부름을 했으니, 총통께서 베푸신 은총 일파만파였음을 세상에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현대시조 100년 대회
마침내 설악산 산감(山監, 무산 말씀)으로 신흥사 주지로 복위(復位)하신 무산 큰스님은 백담사 중창(重創)을 이루시면서 1926년 만해 선사가 백담사에 《님의 침묵》을 지으신 것과 독립운동, 불교 유신 등 항일기(抗日期)에 끼치신 업적을 기려 ‘만해축전’을 일으키셨다. 국가와 민족, 종교와 이념을 뛰어넘는 ‘만해대상’은 노벨상 수상자, 여러 나라의 대통령 등 문학, 예술, 학술, 봉사, 실천 등 이 시대 인류의 스승들에게 시상하여 국격을 높이고 불교의 위상을 인류 앞에 널리 심어주었다.
2005년에는 월레 소잉카 등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하여 세계 40여개국 대표 시인들과 한국 시인들이 금강산에 가서 ‘세계평화시인대회’를 열었다. 북한 시인들도 참가하기로 약속이 되었었는데 갑자기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불발되었으나 하나뿐인 분단국가에서 통일 염원의 시인대회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8월 ‘만해축전’ 행사의 하나로 치러진 것이었다.
무산 큰스님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면서 시조 중흥에 마음을 쓰고 계셨다. 금강산을 다녀오고 두 달쯤 뒤였다. 언제나 무산 큰스님 전화는 반갑고 고마웠지만, 그날 주신 전화는 그것을 넘어서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내년 만해축전에는 시조대회를 하고 싶은데 사천이 맡아주시오.”
1961년 시조로 등단한 뒤에 시조 쓰기에도 게으름을 피우고 이름만 걸어놓고 한 일이 없는데, 내게도 천재일우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나는 맨 먼저 현대시조의 발원지를 찾는 공부를 시작했다. 육당 최남선이 시조집 《백팔번뇌》 후기에도 “시조로 처음 활자에 신세 지은지 스물세 해”라 했으니, 1903년이 현대시조의 원년이 될 것이나 작품을 찾을 길이 없었다. 학자, 교수, 시인들과 거듭 토의한 끝에 1906년 7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대구여사가 발표한 ‘혈죽가’ 3수가 기록으로 나온 최초의 시조로 결론을 내리고 2006년을 ‘현대시조 100년의 해’로 선포하기로 했다.
7월 21일, 시조의 날로 선포하고 ‘세계민족시대회’ ‘한국 대표시조 작곡발표음악회’ ‘한국시조 100선 출간’ 등 서울과 만해축전장, 전국에서 시조 중흥의 횃불이 타올랐다. 마침내 ‘시조여! 시조 만세!’가 백두대간을 뒤흔든 대역사였다.
《한국대표명시선 100》
내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다. “시로 해가 뜨고 시로 달이 지는 나라, 시로 농사짓고 시로 길쌈하고 시로 나라살림 하는 나라.” 그렇다. 이 겨레는 누구랄 것도 없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인’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이것은 저 향가에서부터 내려오는 시의 역사가 증거하는 것이요, 대학에서 시창작을 가르치면서 저절로 머릿속에 박힌 생각이기도 하다.
1만 명을 헤아리는 시인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시를 쏟아내고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책의 나라인데, 정작 겨우 신문학 백 년 한국시문학사를 담아내는 시집은 서점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번은 무산 큰스님께서 “사천 선생! 우리 문학에 꼭 필요한 숙제가 있으면 계획서를 만들어 와요.” 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가 배를 타고 바깥나들이를 하던 중, 현대시, 시조를 아울러 ‘한국대표명시선 100’ 출판을 여쭈었더니 쾌히 허락을 주셨다.
내로라하는 문학출판사들이 시집을 발간하면서도 시문학사를 꿰는 시전집을 내지 않는(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A 회사는 친일 등 이유를 붙이지만 이념적 순종주의를 고집하고, B 회사는 아예 1950년대 말 이후로 선을 긋고……, 이쪽저쪽 이러저러한 장애물이 걸려서……, 아마도 그런 핑계를 대는 것이리라.
단순무식이 전 재산인 나는 막무가내로 자유시와 시조를 통합하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 공정성을 기하고 한국 시문학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에 들어갔다. ‘만해축전’에 맞추는 촉박한 시간도 있어 완벽까지는 어렵더라도 ‘그만하면’이라는 평을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안간힘을 써야 했다.
큰스님도 ‘100인선집’이 낙제점은 아니었던지 나를 불러 5대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하라고 하셨다. 《한국대표명시선 100》은 무산 큰스님께서 알게 모르게 많은 업적을 남기셨지만 그 가운데도 한국 시문학사와 출판 역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을 세우신 것이다.
좁은 지면에 급하게 쓰다 보니 글이 ‘천방지축’ (스님의 임종게)이고 정작 남은 이야기는 대하(大河)인데 안개산 얼굴을 내 어찌 그릴 수 있으리오.
무산 큰스님, 한 번만 더 뵈오면 안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