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 스님 4주기] 쉰여섯 대학교수, 스님 앞에서 목 놓아 울다
아무리 어두운 세상을 만나 억눌려 산다 해도
쓸모 없을 때는 버림을 받을지라도
나 또한 긴 역사의 궤도를 받친
한 토막 침목인 것을, 연대인 것을
영원한 고향으로 끝내 남아 있어야 할
태백산 기슭에서 썩어가는 그루터기여
사는 날 지축이 흔들리는 진동도 있는 것을
보아라, 살기 위하여 다만 살기 위하여
얼마만큼 진실했던 뼈들이 부러졌는가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파묻혀 사는가를
비록 그게 군림에 의한 노역일지라도
자칫 붕괴한 것만 같은 내려앉은 이 지반을
끝끝내 받쳐온 이 있어
하늘이 있는 것을, 역사가 있는 것을.
조오현 스님의 시 ‘침목’(枕木) 전문이다. 5월 12일은 스님 4주기(음력 4월 12일)다. 조오현 스님을 추억하며 그를 기억하는 글을 몇차례 싣는다. 이 글들은 오현 스님의 도반 김병무·홍사성이 엮은 <설악 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 2019년)에 담겨 있다. <아시아엔> 게재를 쾌락해 준 두 분과 출판사측에 심심한 감사말씀을 드린다. <편집자>
[아시아엔=이숭원 문학평론가, 서울여대 명예교수] 조오현 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97년 여름이다. ‘시와시학사’에서 주관한 만해시인학교가 백담사에서 열렸는데, 그때 몇 명의 문인들과 스님을 친견했다.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 세 사찰의 회주로 주석하며 만해사상 선양에 앞장서신다는 스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던 터라 바짝 긴장하고 방에 들어섰다.
스님은 문인들의 자유로운 기풍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서양 나라에서 온 곡차를 권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40도짜리 스코틀랜드 곡차를 맥주잔에 가득 따르고 한 번에 쭉 들라고 하셨다. 나는 스님이 산중에 계셔서 속세의 음주 스타일을 잘 몰라서 이리 하신다고 생각했다.
경험이 있는 다른 사람들은 한두 모금 마시고 술잔을 내려놓았지만, 나는 고지식하게 스님의 말씀을 따라 한 컵을 다 비웠다. 스님께서 젊은 사람이라 체격도 좋고 하니 한 잔 더 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완곡히 사양하였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스님께 이 젊은 교수 부친이 시조시인 아무개라고 소개했다. 스님께서는 반갑고 놀라운 표정을 지으시며 나를 그윽이 바라보신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다. 경상도 억양의 스님 말씀은 거침이 없고 직설적이었다.
“이 교수가 월하(月河) 선생 아들이라니 반갑네. 월하 선생은 나를 시조단에 등단시켜 주신 분이야. 나의 스승이지. 월하 선생 시조가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 면이 있다 해도 월하 선생이 《시조문학》을 간행하여 많은 시조시인을 배출한 공은 인정해야 해. 나에게 월하 선생은 고마운 스승이야. 좋아하는 스승의 자제도 문학을 한다니 기분이 좋군.”
서울로 와서 부친께 오현 스님 만난 것을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기뻐하시며 가람문학상 시상식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1995년 11월에 오현 스님이 가람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시상식이 열렸는데, 시상식 후 기념촬영이 끝나자 상패나 화환을 다 버려둔 채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아는 사람에게 전달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시조시인으로서 작품을 쓰니 문학상은 받지만 상패나 기념패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는 말씀이었다.
그 후 백담사의 만해 관련 행사나 서울의 문학 행사에서 스님을 몇번 뵈었고, 가까이에서 다시 만난 것은 이성선 시인 추모행사 때였다. 이성선 시인은 2001년 5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해 7월 초 백담사에서 49재 추모 법회를 겸한 시비 제막식을 했다. 오현 큰스님께서 법좌에 앉아 법문하셨는데, 그 말씀이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스님께서는 법좌에 앉으신 후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다음과 같은 짧은 말씀을 남기고 내려오셨다. “이성선 시인과 나는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이 백담사에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법문의 전부였다.
그날 내가 맡은 것은 이성선 시인의 시 세계를 소개하는 일이었다. 시 세계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언제나 친절했던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언제나 반갑게 먼저 손을 잡아주던 이성선 시인을 생각하면 전생부터 인연이 이어져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나 이승에서 시인을 다시 볼 수는 없게 되었지만 내세의 어디선가 이성선 시인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세의 이성선 시인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 또한 그를 알아보지 못할 터이니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행사가 끝나자 큰스님께서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이 교수가 불교를 모르는 줄 알았는데 오늘 말하는 것을 들으니 불교를 아주 잘 알고 있어. 이 교수가 이렇게 불교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반갑네.” 그때의 표정과 눈길은 내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 더 따뜻하고 깊었다.
2003년 4월 24일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가 토요일 오후라서 신문에만 알리고 부고를 따로 전하지 못했다. 설악산 백담사에 계신 오현 스님이 오시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스님께서 누덕누덕 기운 가사에 장삼을 두르고 나타나셨다. 나는 너무나 황망하여 큰절을 올렸다. 스님께서는 상주인 나와 잠시 눈을 맞추신 후 아무 말씀 없이 객실로 나가셨다. 그날 스님이 입고 오신 베처럼 성글게 짠 낡은 가사의 이미지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부친의 7주기가 되는 2010년에 《월하 이태극 시조전집》(태학사)을 간행했다. 책을 간행하는 과정에 오현 스님께 서문을 부탁드렸다. 스님께서는 선친이 해방 후 한국 시조의 백두대간이요 현대시조 중흥에 앞장선 선구적 거목이라는 취지의 글을 써 주셨다.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었다. 스님께 책을 드리기 위해 신사동 사무실로 방문하였다.
그날이 어린이날인데, 스님께서 거처를 옮기시는지 일꾼들이 분주히 짐을 싸고 있었다. 홍성란 시인이 일을 돕고 있었다. 스님께서 책을 받아 들고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월급 받아 생활하는 사람이 전집을 자비로 내느라고 수고가 많았다. 우선 만해마을에 책을 한 묶음 보내고 시조학회의 간부, 시조 단체의 임원들에게도 골고루 보내도록 해라. 그 비용은 내가 지불하겠다. 내가 월하 선생에게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은 그 십분의 일도 보답이 안 된다.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할 필요가 없다. 이 일을 계기로 이 선생도 시조에 더 관심을 가지고 아버지 사업을 이어가도록 마음을 쓰기 바란다.”
그 말씀을 들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물밀 듯 일어나 도저히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 쏟아지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그렇게 운 것은 내 생애 처음이었다.
스님은 어린애 보듯 지켜보시고 홍성란 시인은 옆에서 함께 눈시울을 적시었다. 스님의 말씀을 받들어 지금껏 그 일을 아무에게도 발설한 적 없고 지금 처음 글로 쓰거니와, 나는 그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쉰여섯 나이에 그렇게 목 놓아 운 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