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 스님 4주기] “석달 수행보다 ‘저 거리의 암자’ 시 한편이 불경에 더 가깝다”
[아시아엔=신달자 시인, 예술원 회원] 집 앞 창가에 능소화가 불타고 있다. 불꽃 같은 기명색 노래를 토하고 있는 능소화에서 스님의 다비식 불꽃을 떠올리다 울컥 목이 멘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던 불꽃들이 잠잠해지고 불씨만 남았던 다비식 현장을 볼 때 나는 주저앉았다. 누가 알고 있는가. 지나가는 새도, 하늘에 떠 있는 백합 다발 같은 구름도, 쑥쑥 깊어가며 한숨짓는 녹음도 다 모른다고 한다. 그래 스님은 어디로 가신 것일까.
내가 죽음을 몰랐겠는가. 죽음이야말로 나는 너무 잘 아는 일이다. 아버지를 어머니를 남편을 다 그렇게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떠나보냈다. 누구보다 핏줄의 여러 죽음을 지켜보고 몸소 겪었는데, 죽는다는 일은 정확하게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을 가슴 치며 알았는데, 나는 스님을 찾고 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 안으로 빛나던 눈을 가진 스님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침 커피를 마시며 묻는다. 스님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이런 것을 추억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몇 년 전, 그렇다. 몇 년 전인가 보다. 나는 몹시도 나 자신에 대해 좌절하고 있을 때 몇몇 분을 불러 짧은 여행을 떠났던 시간은 지금 생각하면 큰 축복이었다. 그러나 나는 활짝 웃는 모습은커녕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을 하고 경이로운 경치를 지나면서도 얼굴을 펴지 못했다. 스님이 왜 그 몰골을 지나쳤겠는가.
“달자, 노래 하나 불러라.” 나는 ‘봄날은 간다’를 서럽게 불렀고 동행한 몇 사람 노래도 끝났다. 그때 스님은 말씀했다. “달자야, 봄날이 올끼다.” 내게 봄날은 왔을까. 스님의 말씀대로 봄날은 왔을 것이다. 그런 믿음에 나는 서서히 힘을 찾기 시작했다. 알듯 모를 듯한 좌절은 그렇게 없다가도 고개를 내밀기도 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 깨달음을 나는 ‘봄’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늘 과장법을 잘 쓴다. 시인의 과장법은 시의 이미지로 통하니까 그것은 그분의 내장된 무수한 상상력과 통하는 것일 것이다. 낙승(落僧)이라는 말씀도 그와 같은 염불이고 설법일 것이다. 낙승이 아니라 낙인(落人)이라고 바로 앞 사람에게 호통을 치는 것 같은 그 말씀 속에는 오만 가지 경문이 들어 있을 것이다.
스님은 혼자 사는 내가 제대로 먹고 사는가를 늘 물으셨다. 언젠가 코리아나호텔 중국집에서 너무 잘 먹고 있는 날 보시고 말씀하셨다. “그래 혼자 사는 사람은 먹을 게 보이면 많이 먹고 집에 혼자 있을 때는 굶어도 된다.”
그 말씀도 늘 고맙고 배부르게 하는 말씀이었다. 나는 잘 먹는 사람이고 그래서 살이 푹푹 찌는 사람이지만, 그리고 집에서도 굶지 않고 잘 먹는 사람이지만 스님 앞에서 잘 못 먹는 사람같이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던 것일까. 잘 먹던 음식을 갑자기 천천히 그리고 입맛이 없는 사람같이 보이려고 한 것은 아닐까.
2013년에는 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임무가 끝나는 봄, 우리 임원들은 강원도로 떠났다. 그것을 아신 스님이 누군가를 시켜 속초에서 열 명이 넘는 임원들에게 생선회를 푸짐하게 사주셨다. 직접 뵙지는 못했으나 그때 그 임원들도 스님을 향한 기도를 하고 있을 것을 나는 믿는다. 시인협회건 가톨릭문인회건 그가 누구라도 다독거려 보내고 싶은 스님의 그 넓은 마음을 나는 정신이라 부른다.
광활한 광야 같은 정신, 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경지의 정신 도량을 나는 스님에게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스님의 정신 안에는 백두산이 금강산이 설악산이 우뚝 서 계신 것을 믿는다. 그래서 스님의 다비식이 시작할 때 비가 내렸던 것이다. 설악이 슬피 울었던 것이다. 설악이 안개로 덮여 훌쩍이는 것을 나는 분명 보았다.
2016년 나는 가톨릭문인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사무실이 없는 떠돌이 협회라 사무실 마련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래서 바자회를 한다고 말씀드렸을 때, 그래서 그림 한 점만 주시라고 부탁했을 때 “그래.” 짧게 대답하시고 정말 그림 한 점을 주셨다. 그때 한량없이 고맙고 감사했던 기억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 그림을 비싼 값에 팔았고 지금 가톨릭문인회 사무실은 스님의 마음 한 점이 함께한다고 생각된다.
“달자도 시조 몇 편 쓰거라. 그래도 시조 몇 편은 있어야 한다. 시심의 절대 농축이 그래도 시조지. 달자는 누구보다 잘 쓸끼다.”
스님은 가끔 내성적인 내게 칭찬과 응원으로 시조를 써 보라고 등을 떠미셨지만 나는 선뜻 발표를 하지 못했다. 50년 시를 쓰고도 서툴기 짝이 없는 나이기에 미루고 미루었던 것이 시조였다. 짧으니 더 날 속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제 날 좋은 날 여러모로 궁리하고 할퀴며 만진 시조를 들고 가려 했는데, 무문관에서 오래 나오시지 않을 모양이다.
내가 어찌 스님 앞에 시조랍시고 내놓겠는가. 그 생각을 하면 오래 안 나오셔도 될 듯 하지만, 나는 스님이 그립다. 새벽 어스름 저녁 으스름에 언뜻 스쳐가는 푸른 어둠 속에서도 나는 무릎 꿇고 스님을 부르고 싶다. 저녁을 먹고 산책하는 길에 반짝 빛나는 별, 그것은 스님일까?
그러나 무엇보다 스님을 잊을 수 없는 일은 2001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래 투병하던 남편이 떠나고 나는 한강변에서 수서로 이사를 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나에게 담당 의사가 대모산 옆을 권해서였다. 그 당시 수서역 주변에는 포장마차가 많았다. ‘돼지네’라는 포장마차가 내 단골이었는데 나는 혼자 자주 그곳에서 술을 마셨다. 때로는 돼지네 사장께서 소주 반병을 공짜로 주기도 했다. 우울한 날이 계속되던 그때 그 포장마차를 소재로 썼던 시가 ‘저 거리의 암자’였다. 이 시가 바로 스님과의 인연을 만들어 준 내가 아끼는 시다.
어느 여름날이 가까워져 올 때 시인 이상국 선생이 전화했다. 이상국 시인은 자기를 소개하면서 낯선 스님의 이름을 대며 백담사로 한번 다녀가라고 했다. 나는 그 스님이 누군지 몰라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시 전화가 왔다. 여러 이야기가 오간 뒤에 동안거 해제날 백담사를 찾아갔다.
그날 스님은 200여 명의 젊은 스님들 앞에서 ‘여러분이 3개월 수행한 것보다 이 시 한 편이 더 불경에 가깝다’고 말씀하며 내 시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무렵 시가 잘되지 않아 절망하고 있었다. 그런 터에 스님의 한마디는 얼마나 큰 힘이고 위로였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