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 스님 6주기] 산주(山主) 잃은 설악산은 슬픔에 잠겨
굽어도 바르고 바르지 않아도 곧은
[아시아엔=유응오 소설가] 내가 오현 스님을 처음으로 뵌 것은 2006년 10월 4일이다. 그해에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세계종교지도자대회를 개최했는데 행사 뒤 뒷말이 무성했다. 당시 불교계 언론사의 기자였던 나는 그 뒷말을 여과없이 취재해 제법 강도 높은 비판 기사를 썼고, 몇 달 뒤 스님은 직접 나를 찾았다. 스님을 뵌 곳은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서울사무소였다.
스님은 내 기사에 대해서는 잘 썼다, 못 썼다 말씀이 없었다. 다만, 이런 말씀을 했다. “기자들은 직필정론(直筆正論) 운운하는데, 곧다는 것도 바르다는 것도 결국은 그 기사를 쓴 기자의 견해일 뿐이다. 살다 보면 굽어도 바른 게 있고, 바르지 않아도 곧은 게 있는 법이다.”
스님은 수표(水標)의 예를 들기도 했다. “홍수가 나면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가 범람하는 물 위에 둥둥 떠다닌다. 직필이라는 것도, 정론이라는 것도 그 수표와 다르지 않다.”
스님은 문 앞까지 나를 배웅했다. 그리고 대문 앞에서 한가위 떡값과 함께 큼지막한 배를 건넸다. 한가위 연휴가 끝날 때까지 나는 스님이 말씀하신 수표 이야기가 떠올라서 크고 둥근 배를 먹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아야 했다.
역사를 받쳐온 ‘침목’
그 이듬해 새해 첫날, 나는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됐다. 스님께서는 어느 눈이 많이 내린 날, 나를 불러서 자장면을 사주었다. 자장면을 먹는 내내 스님께서는 문학청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젊었을 때 신춘문예에 응모한 적이 있다. 작품을 보내고 대문 앞을 서성거리면서 이제나저제나 (우)체부가 당선 소식을 들고 오기만 기다렸지. 나중에 신문을 보니 최종심에서 떨어졌더라고. 그래서 내가 심사위원을 찾아가서 따졌어. 심사위원이 ‘스님인 줄 알았으면 안 떨어뜨렸을 텐데’라고 말하더라고.”
종단에서도, 문단에서도 원로 대접을 받는 스님이 문학청년 시절 낙선의 경험을 털어놓으셨던 것이다. 나는 스님이 얼마나 담박한 분인지 알 수 있었다.
총재 스님과 총통 스님의 법거량
그해 연말에 나는 조계종의 한 종책 모임이 후원하는 인터넷 언론사로 적을 옮기게 됐다. 그 언론사의 고문 역할을 하신 분이 정휴 스님이었다. 정휴 스님과 오현 스님은 지음(知音)지간이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나는 두 스님의 사자(使者) 역할을 하게 되었다.
두 스님은 서로 총재(정휴), 총통(오현) 스님이라고 부르셨다. 두 스님의 대화에서는 진겁(塵劫)의 시간이 찰나(刹那)에,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의 공간이 티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두 스님의 말끝에는 미늘이 있어서 자칫 한눈을 팔면 금세 마음의 아가미가 낚아채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정휴 스님의 소식을 전했더니 오현 스님이 <하여가>(何如歌)의 첫 구절을 읊조리시면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그리고 해골 인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가 내 낙처(落處)다.”
두 스님이 전한 말씀의 상당 부분이 법거량이었음을 뒤늦게 알았으나, 미욱한 나로서는 두 스님의 말씀이 몇 근이나 되는 것인지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목매기 울음’의 정체
나는 인터넷 언론사가 폐간되자 태국의 치앙마이로 떠났고, 다시 2년 뒤 귀국해 이런저런 직장을 전전했다. 내가 실직의 상태일 때마다 스님은 부침이 잦은 나를 나무라기는커녕 용돈을 건네면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직 타는 법”이라며 박재삼 시인의 시구를 인용해 힘을 북돋워 주었다.
어느 해 봄날에는 서울 정릉의 흥천사로 나를 부르셨다. 조실채에서 스님과 이러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화제(話題)가 경남 밀양에 있는 한 성보박물관으로 옮겨갔다. 밀양이 고향이어서 그랬는지 스님은 일곱 살 때 사찰의 소 키우는 머슴으로 산문(山門)에 들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떠날 때가 되니 어릴 적 산사에서 들었던 산새의 소리가 그립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말끝에 스님의 두 눈에는 아득한 노스탤지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스님의 시에 등장하는 ‘목매기 울음’의 정
체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언젠가부터 스님의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신문 기사를 통해 스님이 백담사 무문관에서 동안거, 하안거를 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018년 5월 중순께 스님은 이태 만에 전화를 하셔서 안부를 물은 뒤 “정휴 스님을 잘 모셔라”는 말씀을 남겼다. 그리고 며칠 뒤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다.
스님의 영결식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잠시 차를 세워 두고 설악산을 올려다봐야 했다. 스님에게 받은 은혜가 컸던 터라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는 게 너무나 죄송스러워서 소매로 눈물을 훔쳐야 했다. 산주(山主)를 잃은 설악산은 슬픔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다.
자욱한 운무(雲霧)에 휩싸인 설악산은 살아생전 스님의 진영(眞影)이었다. 지평선 끝까지 내려다보이는 천야만야(千耶萬耶)한 준령(峻嶺)의 정상(頂上)인가 싶다가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연기 자욱한 소산(燒山)의 영대(靈臺)인 게 스님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이었다.
스님의 두 눈은 때로는 탁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당최 알 수 없었고, 때로는 원체 맑고 투명해서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맑든 탁하든 스님의 두 눈에 깃든 여울목은 참으로 깊어서 그 수심(水深)을 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 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 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 조오현 ‘부처-무자화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