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 스님 6주기] “나도 한때는 소설가가 되려 했지”
[아시아엔=이정 소설가] 큰스님께서 한때 나를 꽤 미워한다는 의심을 품었던 적이 있다. 나는 큰스님의 사제인 홍사성 형으로부터 1990년대 초반 두 권의 사전 집필을 의뢰받았다. <한국불교인명사전>과 《한국사찰사전》이 그것이다. 학자도 아닌 주제에 감히 사전이라니. 3, 4년 동안 죽을 고생, 행복한 고생을 번갈아 하며 200자 원고지 8천 매쯤의 원고를 썼다.
그리고는 내 능력의 지평을 한껏 늘린 기분에 사로잡혔다. 두 사전은 1993년과 1996년에 큰스님의 또 다른 사제가 운영하는 불교시대사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홍사성 형은 한동안 큰스님과 내가 합석하는 자리에서는 꼭 그 책이야기로 나를 추켜세웠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불교 관련 업적이었다.
나는 당연히 큰스님의 상찬을 기대했다. 그런데 큰스님은 그때마다 ‘그 책, 틀려먹었다’고 혹평을 앞세웠다. 때로는 ‘너도 똑같다’며 홍사성 형까지 싸잡아 꾸중했다. 나는 큰스님이 세상 사람들을 다 다감하게 대하면서 나만 미워한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큰스님을 슬슬 피했다. 큰스님이 서울에 오면 머무는 신사동의 유심 사무실에 홍사성 형을 만나러 갔다가도, 큰스님이 계시면 목소리를 죽이고 부닥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남들이 큰스님 방으로 인사를 드리러 가도 나는 형의 사무실에 남곤 했다.
뒤에 알았지만, 큰스님의 힐난은 큰스님의 은사이신 문성준 큰스님을 인명사전에 올리지 않은 데 까닭이 있었던가 보았다. 성준 큰스님의 훌륭한 업적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등재 원칙에 벗어나 일부러 뺀 것이었다. 큰스님의 은사에 대한 존경심 또한 잘 알려진 일이다.
몇년 전 나는 장편 《국경》을 쓰기 위해 만해마을로 내려갔다. 제때에 입실 신청을 하지 않아 작가들에게 제공하는 문인의 집이 이미 다 찼다. 나는 만해마을 관계자들에게 객실료를 내겠다고 떼를 써서 빈 객실을 하나 잡았다. 그렇게 소설을 쓰고 있던 나날에 큰스님이 보이면 얼른 외면하고 멀찍이 도망쳤다. 큰스님의 거소가 옆 건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방부(房付) 인사조차 가지 않았다.
그런 중에 마침내 거소로 호출을 당했다. 나는 재판관 앞에 앉은 죄인처럼 큰스님 앞에 앉았다. “너, 돈 잘 버냐?” 나는 객실료는 걱정 마시라고 호기롭게 대꾸했다. 3개월을 머물기로 작정했으니 사실 내 처지로서는 큰 지출이었다. 큰스님은 사무를 보는 분을 불렀다. “쟈, 얼굴을 보니 돈이 없다. 돈 받을 생각 마라.”
나는 속물의 심보로 “낼 수 있는데요”라고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소설을 쓰려면 일탈을 해야 해. 너처럼 고지식해서는 안 돼. 제대로 된 글이란 안 보이는 걸 쓰는 거야.” 그 뒤 어느 날 큰스님은 내 방을 찾으셨다. 나는 큰스님의 말씀에서 청량한 음색을 가진 현 한 가닥이 튕기는 소리를 들었다.
내 첫 장편이 나온 직후였다. 신사동의 거소로 큰스님께 불려갔다. 홍사성, 김영재 형과 함께였다. 큰스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기보다는 홍사성 형이 큰스님의 호출을 빙자했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큰스님을 더 뵈는 기회를 우정 만들어 주자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쓰긴 쓰더라.” 첫 소설을 낸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나 또한 한껏 자신에 도취해 있었다. 좀 더 적극적인 칭찬을 기대했지만, 그것으로 그쳤다. 그래도 하룻밤은 족히 큰스님의 시간을 빼앗았을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대신 큰스님은 한때 세상을 풍미했던 많은 소설가에 대한 화제로 말씀을 이어갔다. 특히 이청준의 장편 〈축제〉에 대한 비평이 길었다.
“나도 한때 소설가가 되려고 했었지.”
문학지망생 시절 큰스님은 당신이 계신 절에 들어와 소설을 쓰던 이를 만났다고 했다. 그가 쓴 소설 원고를 읽고서 아, 나도 쓸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한 달 만에 장편소설을 완성했다. 어찌어찌하여 그 소설이 김동리 선생에게 전해졌다. 김동리 선생이 등단을 권했지만, 또 어찌어찌하여 사양했다. 그 말씀을 하실 때 나는 한소식 얻은 분의 자유로움 같은 것을 느꼈다. 그 자유로 찾은 어떤 가치들이 그래서 큰스님의 말씀과 행동으로 평소에 드러났구나, 여겼다.
“일탈해. 그래야 사람도 되고 좋은 문학가도 될 수 있어.”
그날 스님은 또 내게 전과 같은 말씀으로 경책을 내렸다. 매여 있지 않은 삶, 그러면서도 불온하지 않은 삶을 생각하게 했다.
큰스님이 세상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을 나누던 날, 설악산 신흥사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운집했다. 신흥사 마당은 수백 개의 오방색 만장들에 에워싸였다. 마당 전면에 ‘설악당 무산 대종사 영결식’이라고 쓴 검은 현수막이 수천 명은 족히 될 조문객들의 시선 중심에 세워져 있었다. 현수막 아래서 스님이 맑게, 환하게, 천진하게 웃고 계셨다.
속마음을 유감없이 드러내던 생전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 이라고 매정하게 대화를 자르듯 웃음은 다른 표정으로 바뀌지 않았다. 승속, 조야,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은 사회 각 분야 명사들이 눈에 띄었다.
“저이도 왔네.” 능히 그럴 것이라고 믿으면서도 막상 마주하니 놀람이 앞섰다. 지위가 높아서가 아니었다. 살면서 한 번도 큰스님과 교류할 일이 없었을 분이라고 지레짐작한 탓이었다. 큰스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분수껏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실천했다.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국량을 보였다.
전태일기념사업회에 매달 후원금을 보냈다. 백담사가 있는 인제 산골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아이들 수백 명에게는 대학 재학 때까지 장학금을 보시해 왔다. 2011년 반값등록금 촉구 집회에 나갔다가 집시법을 위반한 대학생들의 벌금을 대납했다. 쌍용자동차 해고근로자들을 돕는 단체에는 만해대상을 주었다. 모두 몰래 한 일이었다. 뒤에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그 일각이 드러났을 뿐이었다.
“그래서 큰스님이야.”
옆에 앉은 한 시인 역시 놀람을 공감으로 바꾸며 내게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