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 스님 6주기] 백담의 폭설과 심안(心眼)

조오현 스님이 어느 겨울 눈 쌓인 백담사 경내를 걷고 있다. 

[아시아엔=서안나 시인] 조오현 스님(1932년 경남 밀양 출생~2018년 5월 26일 입적)을 생각하면 나는 겨울 백담사의 추억과 스님의 시와 눈빛이 겹쳐 다가온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 많은 인연 중에서도 유독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에게 오현 스님이 그런 분이시다. 나는 눈빛으로 스님을 기억하고 있다.

스님과의 인연을 굳이 찾으라면, 수백 명의 시인이 참여하는 백담사 만해축전 때 먼 거리에서 서툴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몇 해 전에 아는 시인들과 함께 백담사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만해마을에서 스님과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백담의 겨울을 꼭 보리라고 다짐하고 있던 나에게, 아는 지인의 백담사를 여행하자는 제안은 무척 반가운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한적한 만해마을에 여장을 풀고, 백담사로 향했다. 하지만 방문객이 뜸한 1월 초순이라 백담사로 가는 마을버스가 운행을 중지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눈이 쌓인 산길을 오래도록 걸어 백담사에 도착했다.

자동차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백담사 좁은 산길을 걷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고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내 겨울의 백담 풍경과 하나가 되었다. 흰 눈에 덮여 마치 태초의 자연과 같은 겨울 풍광이 오롯이 나의 가슴에 들어와 앉는 것을 느낄 수도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우리는 스님을 뵐 수 있었다. 스님은 바쁜 일정 중에도 시간을 내셔서 우리 일행에게 새해 덕담과 따스한 차를 대접해 주셨다. 나는 쑥스러워서 스님과 지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스님은 내가 무료해 보였던지 나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곤 하셨다. 나는 그때 스님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볼 수 있었는데, 스님의 눈빛이 참 강렬했던 것을 기억한다.

선시(禪詩)처럼 툭툭 말을 던지는 스님의 표정과는 달리, 스님의 눈빛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고, 강직하면서도 애달프고, 어린애의 눈빛과 노인의 눈빛이 다 깃들어 있었다. 마치 분별심을 내려놓고, 세상의 모든 비밀을 본 자의 눈빛이었다.

조오현 큰스님. 그의 웃는 모습은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그리고 스님의 눈동자는 마치 영혼의 눈빛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생이 아닌 전생을 관조하는 심안과도 같았다. 스님은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백담사를 오를 때 마주한 설원의 침묵처럼, 물질의 표면만을 바라보는 육안이 아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깊고 묵직한 심안의 눈길이었다. 나는 그때 오현 스님은 눈빛으로 산도 옮길 수 있는 시인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우리 절 밭두렁에 벼락 맞은 대추나무
무슨 죄가 많았을까 벼락 맞을 놈은 난데
오늘도 이런 생각에 하루해를 보냅니다.
– 조오현 ‘죄와 벌’ 전문

내가 스님의 눈빛을 다시 만난 건 스님의 시에서였다. 스님의 시는 아포리즘처럼 혹은 선시나 오도송처럼 사물의 본질에 가닿는 고도한 상징 미학과 심오한 사유의 노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스님의 시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독자들의 심장에 오래 머물러 있게 된다. 특히, ‘죄와 벌’을 읽을 때면 스님이 심안으로 마주하는 그 어떤 풍경을 나도 함께 목도하게 된다.

“절간 밭두렁에 벼락 맞은 대추나무의” 죄를 읽어내는 시적 화자의 시선이, 곧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대추나무에 내려치는 벼락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나’를 겨누는 칼날이 된다. 이 칼날은 부처의 말씀이며, 불전사물(佛殿四物)의 영험함과도 같을 것이다.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전사물은 모두 네 가지이다. 종과 법고와 목어 그리고 운판이다. 이 네 개의 불전사물은 깨달음을 전하는 부처의 말씀을 대신하며 세상천지 중생과 축생들을 제도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불전사물의 소리는 삼계중생을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고 해탈의 길로 인도한다. 범종 소리는 명부 세계의 중생을, 법고 소리는 모든 축생을, 목어 소리는 물속 생물을, 운판 소리는 날짐승을 제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시에서 대추나무에 떨어진 벼락은 마치 범종 소리처럼 ‘나’에게로 전해져 오는 불법이기도 하다. 법요 의식 중 제일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는 그 둔중하고 은은한 소리처럼 불전사물 중에서도 꽃이라 할 수 있다. 이 종을 범종이라는 부르는 이유 역시, 불교에서 범(梵)이란 우주 만물이며 진리이고 맑고 깨끗함이며 한없이 넓고 크고 좋다는 뜻을 담고 있어서다.

오현 스님의 시에서 대추나무를 때리는 벼락은 시를 뛰쳐나와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범종 소리처럼 다가온다. 내가 본 스님의 눈빛의 힘은 아마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범종 소리를 눈으로 읽는 힘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오현 스님은 천생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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