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 스님 4주기] ‘키다리 스님’의 엄한 자비심

2011년 11월1일 조오현 스님(오른쪽)이 압델라힘 엘알람 당시 모로코작가연합회장(가운데), 바이올린 연주자 배제니(왼쪽)씨와 책을 펼쳐 보며 얘기하고 있다.

아무리 어두운 세상을 만나 억눌려 산다 해도
쓸모 없을 때는 버림을 받을지라도
나 또한 긴 역사의 궤도를 받친
한 토막 침목인 것을, 연대인 것을

영원한 고향으로 끝내 남아 있어야 할
태백산 기슭에서 썩어가는 그루터기여
사는 날 지축이 흔들리는 진동도 있는 것을

보아라, 살기 위하여 다만 살기 위하여
얼마만큼 진실했던 뼈들이 부러졌는가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파묻혀 사는가를

비록 그게 군림에 의한 노역일지라도
자칫 붕괴한 것만 같은 내려앉은 이 지반을
끝끝내 받쳐온 이 있어
하늘이 있는 것을, 역사가 있는 것을.

조오현 스님의 시 ‘침목’(枕木) 전문이다. 5월 12일은 스님 4주기(음력 4월 12일)다. 조오현 스님을 추억하며 그를 기억하는 글을 몇차례 싣는다. 이 글들은 오현 스님의 도반 김병무·홍사성이 엮은 <설악 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 2019년)에 담겨 있다. <아시아엔> 게재를 쾌락해 준 두 분과 출판사측에 심심한 감사말씀을 드린다. <편집자>


“종교를 위해서 문학을 버리지도, 문학을 위해서 종교를 버리지도 않았다”

[아시아엔=나민애 문학평론가] 맨 처음 오현 스님의 얼굴을 뵌 것은 2012년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만해마을에서 문학 콘서트를 하는 팀의 일원이었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후원하는 그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서울에서는 꽤 많은 사람이 준비했고 8월 12일에 맞춰 사당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움직였다.

버스가 도착한 강원도 인제는 계곡의 너럭바위가 본 적 없이 희고, 물 아래 돌들마저 투명한 곳이었다. 계곡 물소리가 사람 목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그곳에서 나는 일행을 따라 짐을 풀었다. 그곳에 가면 ‘그분’을 꼭 뵐 것이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사람이 많으면 잘 나오시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늦은 오후 멀리서 한 노스님이 걸어오는 것을, 그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인사하는 것을 보았다. 단박에 ‘그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한눈에 뵈어도 오현 스님이었다. 첫 만남에서 나는 내심 기대했었다. 뭔가 소소한 알은 체 정도로 나를 기억해 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스님은 그냥 허허 웃으시며 지나가 버리셨다. 인사말을 잔뜩 준비했는데, 고맙다는 말도 드리고 싶었는데 무슨 말을 꺼낼 새가 없었다. 덕분에 풀이 잔뜩 죽어 공연히 발로 땅만 파댔던 기억이 난다. 초면인데도 내 멋대로 반가워했던 이유는, 나에게 오현 스님은 ‘키다리 아저씨’에 필적할 ‘키다리 할아버지’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오현 스님을 처음 뵌 것은 2012년이었지만 나는 그보다 한참 전에, 10년도 더 전부터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19살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해 혼자 살던 나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과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일면식도 없는 어떤 분, 오현이라는 스님이 앞으로 내게 장학금을 주신다는 것이다.

학부 시절 나는 그 장학금으로 인해 공부하고 생각하고 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래서 공부하고 생각하고 쉴 때는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이름만 아는 그 할아버지 스님을 떠올리곤 했다. 그렇게 해서 오현 스님은 내게 ‘키다리 할아버지’가 되었다.

고승이셔서 염력이 있으신가, 내가 고생하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어린 마음에는 별의별 의문도 들었고 때로는 감사의 편지를 써서 무작정 백담사로 보내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2012년의 그 오후에 나는 미지의 은인을 드디어 만난다는 생각에 감격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오현 스님이 장학금을 지원해주신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나의 아버지 나태주 시인은 현대불교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데 오현 스님은 그 문학상의 상금이 조금 적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 시상식에서 아버지와 나는 같이 기뻐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현 스님은 마음에 걸리셨던지 애써 그 시인의 딸을 찾아, 시인도 모르고 딸도 모를 상금을 오래도록 지원해 주셨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2012년 만해마을 마당에서 감사의 인사를 올렸어도 스님이 모른 척하셨으리라 생각했다. 과연 그가 한눈에도 오현 스님인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는 사뭇 다정하게 ‘키다리 은인’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표현은 내 쪽의 주관일 뿐이다. 딱 한 번 뵌 실제의 느낌은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웃고 계시지만 따라 웃을 수 없을 정도로 그분에게는 매우 범접하기 어려운 엄중함이 있었다. 그의 뒷짐, 걸음, 눈빛, 말 등등이 내가 사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것과 다른 의미를 뿜고 있다고나 할까.

그 의미를 모르면서 압도당하기 때문에 자연히 저분은 몹시 매운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경험적으로도 오현 스님을 잘 모를 뿐더러, 정말 알 수 없는 분이어서 잘 모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는 몹시 거대한 세계가 복합적으로 깃들어 있다. 스님은 불교의 세계에서 큰 스승이지만 문학의 세계에서도 열정을 특별하게 간직한 시인이다.

스님이면서 문학인으로서의 지조나 열정을 조화한 인물은 종교적 세계에서도 문학적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를테면 품이 큰 까닭에 문학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를 복합적으로 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를 위해서 문학을 버리지도 않았고, 문학을 위해서 종교를 버리지도 않았다는 면에서 거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거인의 풍모를 한눈에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느낌은 워낙 강렬해 여기 옮기지 않을 수 없다. 스님과 그의 문학에서는 분명 세상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심이 느껴지는데 그 자비심은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자비심처럼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엄한 자비심이라는 면에서 차별성이 있다. 서릿발처럼 단호한, 날카로운 칼날처럼 무서운 자비심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세상을 사랑해놓고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돌아서는, 마치 2012년에 만난 뒷모습 같은 태도랄까.

그러니 오현 스님은 정녕 범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깊이의 큰 어른일 수밖에 없다.

필자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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