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조오현 스님 3주기] 권영민 “내 마음속의 큰 산”
<아시아엔>은 5월 26일, 시조시인이자 선승으로 생을 마감한 설악 조오현 스님 3주기를 맞아, 스님을 추모하는 각계인사들의 글을 몇 차례 나눠 싣습니다. 이 글들은 2019년 5월 시인 김병무·홍사성이 엮어 낸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에 실린 것들입니다. <편집자>
[아시아엔=권영민 문학평론가, 전 서울대 교수] 백담사에서 처음 만해축전이 열렸던 해의 일이다. 만해 한용운의 문학을 새롭게 평가하는 심포지엄에서 나도 논문 하나를 발표하게 되어 있었다. 한용운이 3·1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두 해 넘게 투옥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후 다시 찾은 곳이 백담사였다.
첫 번째 만남
그는 백담사에서 시집 <님의 침묵>(1926)의 시들을 썼다. 한용운의 시는 지금까지도 그 창작 배경이 베일에 싸여 있지만, 이 깊은 계곡의 작은 산사는 한국문학 최고의 문제작을 만들어낸 문학적 성소(聖所)였다. 백담사 경내를 들어서면서 나는 만해 한용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이 산사에서 뜻밖에도 아주 소중한 노스님을 한 분을 처음 뵙게 되었다. 허름한 승려복의 노스님이 절간 마당에 떨어진 휴짓조각을 주워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노스님은 경내로 들어서는 우리 일행을 향하여 합장하며 어디서 오시는 분들이신가 하고 물었다.
나도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문학평론가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이 스님은 내 말을 듣고는 크게 웃으신다. “쓸데없는 공부에 매달려 계신 분이구먼. 문학평론이라니……” 나는 깜짝 놀랐다. 처음 뵙는 스님인데 이런 식의 대화에 내가 어떻게 응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저 웃고 말았다.
“평론이라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참 허망하기 짝이 없는 언어의 그물질이지요. 바탕 자체가 없는 글이 되기 쉬우니까요.” 나는 어이가 없다. 비평 활동을 그래도 수십 년간 해오면서 이런저런 책을 내기도 했는데, 이 노스님은 그것을 허망한 그물질이라고 지적하신다. 내 표정이 굳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셨는지 그 노스님이 내게 다시 한마디를 더 하신다.
“글이란 자기 혼이 담겨야 제 글이지요. 그런데 요즘 평론이라는 것은 대개 남이 만들어 놓은 방법론을 빌려다가 다른 사람이 쓴 작품 가지고 왈가왈부 시시비비만 하지요. 그러니 허망할 밖에요. 계곡의 깊은 못에 커다란 물고기가 간밤 폭포를 타고 오르면서 용이 되어 승천했지요. 그런데 거기 무어가 남아 있을 거라면서 사람들은 그 물속으로 그물을 던집니다. 물고기는 이미 승천했는데 그물에 무어가 걸리겠습니까?”
노스님은 말씀을 마치면서 ‘그냥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하고는 내 손을 잡아주신다. 나는 노스님의 말씀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나 자신이 해 오고 있는 문학 공부의 허점을 그대로 지적하신 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그만 기가 죽었다. 백담사 계곡의 물소리만 산중에 가득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산등성이로 눈길을 돌렸다. 설악의 높은 봉우리에 안개구름이 띠를 둘렀다. 설악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나는 마치 크게 한 번 ‘할방’이라도 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 노스님이 궁금했다. 일행 가운데 한 분이 가만히 내게 알려준다. 설악산 신흥사의 회주이신 조오현 스님이란다. 나는 또 한 번 화들짝 놀랐다.
두 번째 만남
내가 현대불교문학상 평론 부문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였다. 나는 대학의 초청을 받아 일 년 동안 한국문학을 강의하면서 혼자 대학 캠퍼스 부근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해 봄은 유난히도 늦었다. 눈보라가 치던 4월 말로 기억된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여러 차례 한국에서 전화가 왔었다는 표시가 보였다. 집에서 걸려왔던 전화였다. 확인해 보니 내가 현대불교문학 평론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외국에 나와 있는 사람을 수상자로 선정한 것에 놀라서 사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심사에 참여했던 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런데 그분 말씀이 좀 마음에 걸렸다. 백담사 조오현 스님의 뜻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나는 만해축전에 참석하면서 한번 조오현 스님을 만나 뵌 적은 있었지만, 스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시상식에 참석도 못 했다.
조오현 스님께 어떻게 감사 인사를 올려야 할지도 걱정되었다. 그러다가 캐나다산 아이스 와인 두 병을 구했다. 값이 제법 나가는 귀한 포도주였다. 이 아이스 와인은 가톨릭 신부들도 즐긴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포도주 두 병을 깨지지 않도록 단단히 포장하여 우체국에서 항공 소포로 백담사 조오현 스님께 부치기로 했다. 내용물은 ‘식용 식초’라고 거짓으로 적었다. 그리고 두 통의 편지를 썼다.
하나는 조오현 스님께 올리는 것이었다. 미국에 체류 중인데 강의를 뺄 수 없어서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큰 상을 받도록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뜻을 적었다. 연말에 귀국하게 되면 꼭 한번 백담사로 찾아뵙겠다고 했다. 또 다른 한 통의 편지에는 내가 금년도 현대불교문학 평론상의 수상자라는 것을 밝히고 조오현 스님께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편지를 절간으로 보내게 되었으니 스님의 시중을 드는 분이 혹시 이 소포를 받으시면 큰스님께 편지와 함께 전해 올려주십사고 적었다. 그리고 소포로 부치는 포도주 두 병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편지에 적어 넣었다.
이 포도주는 캐나다에서 만든 아이스 와인인데 겨울눈을 맞은 포도를 따서 담근 것이라고 합니다. 가톨릭 신부들도 즐기는 것이라서 상관없을 것 같아 조오현 큰스님께 올리고자 합니다. 조오현 큰스님이 이걸 받으시고 크게 한번 웃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허물하지 마시기를 빕니다.
절간의 스님께 포도주를 보내드리는 것이 아무래도 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소포를 부친 뒤 한 달이 지났는데 백담사 ‘무산’ 스님한테서 한 통의 짤막한 편지가 왔다. 나는 단번에 조오현 스님께 보낸 편지를 받은 시자(侍者) 스님이 답장을 보내온 것으로 알았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현대불교문학 평론상 수상자가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외국에 나가서 한국문학을 가르치고 계시다니 늘 평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보내주신 편지와 포도주는 조오현 큰스님께 올려드렸습니다. 큰스님께서는 크게 웃으시면서 문도들 앞에서 그 포도주를 자랑하셨습니다. 박사님 임무 마치고 귀국하시면 조오현 큰스님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무산 합장
나는 미국에서 부친 소포가 아무 문제 없이 한국의 강원도 설악산 계곡에 있는 백담사까지 전달된 것이 기뻤다. 더구나 무산 스님이라는 분이 조오현 큰스님께 내 편지와 함께 포도주를 잘 올렸다는 답장까지 보내주신 것이 반가웠다. 나는 곧바로 다시 답장을 무산 스님께 써 보냈다. 조오현 큰스님께 소포와 편지를 잘 전달해 주신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도 적었고, 귀국하면 꼭 백담사를 찾아가겠다고 썼다. 조오현 큰스님께 다시 한번 문안 인사를 올려주십사는 당부도 덧붙였다.
연말에 귀국한 뒤에 나는 백담사 대신에 서울 조계사 근처의 찻집에서 조오현 스님을 뵐 수 있었다. 나는 무산 스님이 내게 편지를 보내주신 말씀도 조오현 스님께 말씀드렸다. 조오현 스님은 내 말씀을 들으신 후 빙그레 웃으시면서 “예, 고마우신 선물도 잘 전해 받았습니다. 무산이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 산속 절간의 중들은 이래저래 이름이 많지요”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어리둥절 하다가 뒤늦게 ‘무산(霧山)’이 조오현 큰스님의 법명(法名)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참으로 어이없는 실수를 했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번 크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박사님의 마음으로는 무산과 조오현이 다른 사람으로 보인 것이지요. 그렇게 보신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천지만물의 형상은 모두 보는 이의 마음에 달려 있으니까요.”
그리고 마지막 만남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게 된 것이 벌써 5년이 되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을 준비하던 중에 하인즈 교수가 연락해 왔다. 미국 뉴욕주립대학의 하인즈 펜클(Heinz Insu Fenkl) 교수는 무산 조오현 스님의 시조에 빠진 분이다. 하인즈 교수는 불교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으며 동양 사상이나 철학에도 해박하다. 그가 조오현 스님의 시조를 읽고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전 세계 시인들 가운데 선시(禪詩)를 직접 쓰고 있는 현역 시인으로 무산 스님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스님의 선시는 그 의미가 아주 깊은데도 쉽게 이해된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는 스님의 단시조 가운데 선정(禪定)의 세계를 그려낸 단편을 골라 번역하여 <For Nirvana(적멸을 위하여)>(컬럼비아대학 출판부)를 수년 전에 발간했다. 그리고 다시 두 권의 번역 작품집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 하나가 《절간 이야기》의 영역본이고 다른 하나는 스님의 연시조집이다.
<절간 이야기>의 번역 작업이 마무리되고 있는데 책에 조오현 스님의 서문을 꼭 실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하인즈 교수는 내가 방학에 한국에 나가게 되면 한번 스님께 부탁을 올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미국 출발 전날 백담사 무금선원에 연락을 취했다. 지난해 식도암 수술을 받은 후 스님은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그대로 절간에 머물러 계셨다. 나는 한국에 도착하면 선원으로 큰스님을 찾아뵙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내가 백담사를 찾은 것은 지난 5월 24일이었다. 부처님오신날이 지난 뒤였다. 시자(侍者)가 나를 스님 계신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스님은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많이 야위신 모습이었지만 그 카랑카랑 하신 음성은 여전하였다. 큰스님은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박사님은 언제까지 버클리대학에서 가르치실 것인가요?” “당초 약속이 2020년까지입니다. 그런데 내년까지만 하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나는 일년이라도 빨리 돌아와 큰스님 호쾌하신 선문답을 곁에서 자주 듣고 싶다고 했다. 스님은 그렇게 약속을 바꾸어도 되는 일인가를 내게 물으셨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했다. “박사님 돌아오실 때까지는 살아 있을 겁니다. 의사도 한 3년은 문제없다고 하였으니. 그러니 임기 다 마치고 맡은 일 잘 마무리하고 오세요.”
나는 큰스님의 음성으로는 앞으로 10년도 걱정이 없어 보이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인즈 교수가 부탁한 영역 <절간 이야기>의 서문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큰스님은 손을 내저었다.
“그 책에 무슨 서문이 필요가 있나요? 그냥 엮어내라고 하세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이야기인데……”
나는 그 말씀에 더는 책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뜨려 하자 큰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꼭 내가 쓴 서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반갑게 “예.” 하고 대답을 드리니 큰스님은 <절간 이야기> 가운데 일곱 번째 것을 서문으로 쓰라고 하셨다. 나는 그 일곱 번째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지만 분부대로 하겠다고 인사를 드린 후 방을 나왔다. 시자가 따라오면서 큰스님이 오늘 아주 즐거우신 모습이라고 귀띔했다. 그리고는 걱정스럽게 내게 말했다.
“벌써 두 달 가까이 조석 공양을 거의 못하시지요. 겨우 미음 조금 넘기시는데 요즘은 그것도 힘들어하십니다.” 그러면서 큰스님 암 수술하신 부위의 식도가 거의 막혀서 음식을 삼키실 수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곡차(막걸리)로 입을 축이실 뿐이라면서 한숨을 쉬었다. 외부에서 식도로 관을 삽입해야 한다는데 큰스님은 그런 의사의 처치를 듣지 않으신다고 했다. 아무래도 큰스님이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룻밤 백담사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저녁 공양 끝나신 후에 잠깐 다시 큰스님을 뵐 생각이었다. 그리고 시자가 정해주는 방에 들어와 가방을 풀고 노트북을 꺼냈다. 컴퓨터에 보관된 파일 가운데 내가 엮었던 큰스님의 시전집 《적멸을 위하여》(문학사상사)를 열었다. 거기서 《절간 이야기》의 일곱 번째 이야기를 찾았다. 그것은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이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임제 스님의 법제자 관계(灌溪) 스님은 임종하던 날 시자와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앉아서 죽는 것도(좌탈, 坐脫) 진기할 것이 없고, 서서 죽는 것도(입망, 立亡) 신통치 않고, 거꾸로 서서 죽는 것도(도화, 到化) 그리 썩 감심(感心)이 안 되니……. 옳지! 나는 이렇게 가야겠다.” 하고 일어나 마당에 가서 잠시 서 있다가 한 발짝, 두 발짝,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발짝까지 걸음을 떼어놓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 걸어가던 모양 그대로 죽었답니다. 이 일화를 우리 절 늙은 부목처사에게 했더니 부목처사는 뻐드렁니를 다 내어놓고 “살아보니 이 세상에서 제일로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은 아무래도 죽는 날이 될 것 같니더.” 하고 빙시레 웃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읽고 나서 방을 나왔다. 그리고 시자를 찾았다. 큰스님을 뵈어야겠다고 했더니 내일 아침에 뵐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날 밤 밤잠을 설치면서 설악 백담의 계곡 물소리를 들었다. 큰스님은 스스로 떠나실 날짜를 가늠하셨던 것일까? 다음 날 아침 큰스님은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다. 나에게 서울로 올라가라고만 하셨다. 밖에 병원의 응급차가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한국 현대 문단에서 선시조의 개척자가 되었던 무산 조오현 대종사는 2018년 5월 26일 열반에 드셨다. 큰스님은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을 그렇게 스스로 택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