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 디즈니의 ‘미키마우스’ 탄생 비화

월트 디즈니와 미키 마우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미키마우스는 월트 디즈니사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다. 1928년 <증기선 윌리>로 데뷔한 이래 지난 90여년간 애니메이션 장르 자체의 심볼로 여겨져 왔다. 현재 디즈니 캐릭터 산업 수익의 50%를 차지하고 있는 미키마우스는 대중미디어예술이 배출해낸 전무후무한 수퍼스타다.

그런 미키 마우스는 지금의 ‘월트 디즈니사’를 있게 해준 아주 고마운 캐릭터다. 미키마우스를 탄생시킨 월트 디즈니(1901~1966)는 자신의 출생에 의문을 품었던 사람이다. 월트 디즈니는 그림에 취미를 붙이며 힘든 유년기를 극복했다.

그러나 만화가로 성공하고자 했던 그의 꿈은 소질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아무도 재능을 인정해주지 않자 스스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한 그는 미키 마우스의 성공을 발판으로 미국 애니메이션 산업, 캐릭터 산업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후 디즈니랜드라는 테마파크를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케이블, 위성, 음악, 레저 스포츠 등, 미디어 콘텐츠 분야를 망라한 글로벌 미디어 그룹이 되었다.

미키 마우스

‘시련은 성공의 디딤돌’이다. 떠돌이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한 소년이 있었다. 농촌의 조그만 마을에서 자란 소년은 전원풍경을 백지에 그리며 가난했어도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소년의 크레용에서 어느 날엔 시냇물이 흘러나왔고, 파란하늘도 펼쳐졌으며, 풀들도 부드러운 바람에 춤을 추곤 했다.

아버지를 따라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뒤, 신문배달을 하던 소년은 신문 만화가를 꿈꾸며 남몰래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 만화는 보석이었고, 꿈이었으며, 자존심이었다. 소원대로 소년은 자라 신문사 만화가가 되었다. 그런데 이 젊은이의 야심작과 자존심을 담당국장이 날마다 평가절하 하며 퇴짜를 놓았다.

“이걸 그림이라고 그리나? 차라리 그만 두는 게 어떨까?” 늘 이런 소리를 듣던 그는 급기야 어느 날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며 일했던 곳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다. 그는 실의에 빠진 채, 갈 곳을 몰라 방황하다가 고향인 농촌으로 내려갔다.

그는 농촌에서 한 교회의 지하창고를 빌려 쓰며 잡일을 했다. 지하창고의 어둠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의 인생 지하창고가 보물창고로 변하는 일이 생겼다. 상처를 받은 그는 창고를 뛰어 다니는 쥐새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예쁘고 친밀감 있게 쥐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쥐는 더 이상 징그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긍정적으로 보니 다정한 말벗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그림이 바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키마우스>다. 젊은이는 미키마우스를 만든 다음, 메리 포핀스, 신데렐라, 피노키오, 피터 팬 등과 같은 만화영화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뒀다.

특히 대공황이 휘몰아치던 1933년, 늑대의 대항해, 벽돌집을 짓는 돼지의 모험을 그린 ‘세 마리의 작은 돼지’라는 영화를 제작, 당시 암울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던져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디즈니에게는 참혹한 지하창고가 사실은 보물창고였다. 가장 암울한 때, 창조와 기회의 문이 열렸던 것이다. 그에게 지하창고가 없었더라면, ‘미키 마우스’도 ‘디즈니랜드’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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