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안희정·오거돈과 다윗의 ‘밧세바 신드롬’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안희정 전 충남시장에 이어 오거돈 전 부산시장 그리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까지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도덕적 해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밧세바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다. 권력을 거머쥔 사회지도층의 윤리적 타락을 이르는 말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에 도취되어 현실감각이 흐려지고 결국 윤리적 실패를 저지르는 것을 ‘밧세바 신드롬’의 비극이라고 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 다윗은 블레셋 군대와 맞서 싸워 골리앗을 죽게 만든 민족의 영웅이지만, 부하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에게 욕정을 품어 임신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야 장군을 소환해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려 하지만 매번 실패에 그친다.
결국 다윗은 우리야 장군을 전쟁터 최전선으로 보내 죽게 만들고 밧세바를 부인으로 맞으나, 태어난 아이는 신(神)의 분노로 일찍이 죽고 만다. 두 사람사이에 태어난 자식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이 솔로몬이다.
그럼 왜 이 밧세바 신드롬이 생겨날까? 이를 위해선 우선적으로 사회지도층의 성추문 논란이 ‘왜’ 계속 반복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에 대한 해결책과 대안도 모색할 수 있다. 최근 몇년에 걸쳐 발생한 일련의 사건을 단편적으로 정의 내리거나 해석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를 ‘리더십의 윤리적 실패’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어느 정도 그 원인과 배경을 가늠해 볼 순 있을 거다. 1993년 미국 비즈니스 윤리저널에 실린 논문 ‘밧세바 신드롬(Bathsheba Syndrome)’은 일부 지도자들의 실패를 도덕성에서 찾은 바 있다.
논문은 일부 지도층의 윤리적 실패 사례를 분석, 그 원인을 다음의 4가지로 압축해 제시한다.
첫째, ‘누구에게도 제약받지 않는 지도층의 권력’
둘째, ‘이를 통해 모든 걸 은폐할 수 있을 거란 오판’
셋째, ‘정보 또는 사람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 가능성’
넷째, ‘개인적·조직적 성공이 주는 만족감으로 인한 본연의 목표 상실’이다.
20여년 전 나온 분석이지만 지금의 지자체장이 갖는 권한 등을 고려했을 때 이를 현 사태에 대입해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은 적지 않다. 김민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본적으로 국내 정치권 인사 등의 권위는 상당한데 그중에서도 지자체장이 갖는 권위는 무소불위(無所不爲)에 가깝습니다. 중앙기구의 경우 여야로 갈려 여러 제도적 장치를 통해 감시와 견제를 지속해서 이어갑니다. 하지만 지자체장들은 지역에서 사실상 그 어떤 견제도 받지 않습니다. 지역 의회의원들의 권한은 지자체장의 권한과 비교했을 때, 그 존재 의미가 미미할 정도로 작습니다. 견제는 거의 이뤄지지 않습니다. 밧세바 신드롬 논문의 분석이 지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겁니다.”
실제 박원순 전 시장 등은 피해자의 고소 사실을 미리 파악할 정도로 상당한 정보력과 통제력을 가졌고, 피해자는 이로부터 엄청난 공포심을 느꼈다고 진술한다. 무엇보다 이런 권력형 성추행과 폭력에서 지도자는 자신의 통제력을 과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이번 사태를 두고 ‘성적 욕망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지도자냐?’라고 말한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자기 관리와 사회적 능력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그렇기에 그 자리까지 오른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욕구대로 행동해도 문제는 되지 않을 거란 판단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들을 견제, 구속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미비했고 법원과 사회는 이에 대한 처분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사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욕망과 착심에 끌려 죄 무서운 줄을 모르는 것은 마치 그물 안의 물고기가 그물 안을 숨을 곳으로 아는 것과 같다.
도를 닦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알아 마음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무상한 유(有)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천상락을 구하기에 힘쓰는 것이다.
각고 끝에 높은 자리에 올랐으면 모름지기 ‘밧세바 신드롬’의 비극 정도는 능히 극복해, 명예를 길이 지켜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