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옥의 주식이야기⑪] 기업이 자사주 매입으로 부리는 마법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애플 본사. 2018년 애플사는 1000억달러 어치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했다. 이렇게 기업의 곳간을 비웠다가 새로운 사업 기회를 발견하면 증자를 한다. 투자자들이 경영자를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시아엔=박영옥 주식농부, 스마트인컴 대표, 아시아기자협회 이사] 1억원을 빳빳한 새 지폐로 인출한다. 통장에는 연리 2퍼센트의 복리가 붙는 100만원만 남았다. 인출한 돈은 금고에 넣어둔다. 오래오래, 장기적으로 넣어둔다. 한 36년쯤 지나서 금고를 열고 은행에 다시 입금한다. 실질가치는 달라지겠지만 1억원은 똑같은 1억원이다. 반면 통장에 있던 100만원은 200만원이 된다.

금고 안에 있었던 돈은 일을 하지 않았다. 돈은 투자라는 형식의 일을 해야 돈을 번다. 돌고 돌아야만 돈을 만드는 것이 돈이다. 이런 돈을 모아주면 보다 높은 수익이 나게끔 효과적으로 일을 시키겠다는 것이 기업의 상장이다. 기업 상장의 1차적인 목적은 자금 조달이고, 자금 조달의 목적은 사업을 위한 투자다.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하는 이유

그런 기업이 돈을 쌓아두고 있다면 기업의 본질과 맞지 않다. 유보금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자사주 역시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수익을 낸 기업이 벌어들인 돈을 주주들에게 나눠주거나 사업에 재투자하지 않고 자기 주식을 사들인다는 것은 주식회사의 본질을 봤을 때 모순이다. 돈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기업이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자사주는 일정 부분 순기능도 있다. 기업의 가치에 비해 주가가 과도하게 하락할 때 자사주를 매입함으로써 주가 하락을 막을 수 있고, 반대로 매입해둔 자사주를 매각함으로써 주가의 과도한 상승을 막을 수도 있다. 주가가 올라가면 좋은 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기업가치보다 높은 주가는 반드시 제자리를 찾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면 높은 가격에 산 새로운 주주들이 손실을 보게 된다. 또한 자사주에는 배당을 하지 않으니 동일한 배당성향이라도 주주들에게 더 많은 배당금이 돌아간다. 자사주로 갖고 있던 자금은 필요할 때 사용할 수도 있다.

2017년 초, 나는 한 기업에 자사주 매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해당 기업은 5,000억원의 유보자금을 2퍼센트대 금리를 주는 상품에 묶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기업의 배당수익률은 4퍼센트가 넘었다. 그 돈으로 자사주를 산다면 2퍼센트의 차익이 생길 것이고, 이 자사주에는 배당하지 않으니 주주들에게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성장성은 적지만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기업의 경우에는 자사주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잘 쓰면 좋은 것을 악용하는 사람이 있다. 업력이 70년이 넘고 상장한 지도 20년이 넘은 어떤 기업은 자사주를 60퍼센트 가까이 갖고 있다. 직접 투자한 기업이 아니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자발적인 상장폐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지분이 95퍼센트가 넘으면 상장을 폐지할 수 있는데 그 기업의 경우 대주주의 지분과 자사주를 합치면 거의 90퍼센트에 육박한다. 하지만 누차 강조했듯 기업의 모든 자산은 주주들의 공동재산이다. 따라서 자사주 매입도 주주들의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 자사주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상장을 폐지하면 결국 공동 재산으로 매입한 자사주가 대주주의 것이 된다.

“주주들이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라는 주장도 가능하긴 하다. 주식회사의 정의와 약속에 어긋나지만 주주들이 충분한 시세차익을 남길 수 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니냐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많은 자사주를 보유한 기업의 대주주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할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니나 다를까. 이 기업의 PBR(주가순자산배율)은 1이 되지 않는다. 1퍼센트대로 주던 배당수익률은 2016년 들어 0.5퍼센트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배당성향은 2퍼센트를 겨우 넘는다. 100만원을 벌어 2만원을 주주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매년 수백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는 기업인데 대주주가 이런 짓을 하고 있다. 나머지 5퍼센트의 주주들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대주주, 자사주 통해 이렇게 마법 부려

자사주를 통해 마법을 부리는 대주주도 있다. 지주사라는 주문을 외면 마법이 시작된다. 애초 지주사가 도입된 취지는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지주사를 장려하기 위해 세금 납부를 연기해주는 혜택까지 부여하고 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지주사로 전환하면서 납부를 연기해준 양도소득세 금액만 7800억원이 넘는다.

이렇게 세금 혜택을 받으면서 지분까지 늘릴 수 있다.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나누면서 자사주를 신주로 배정받으면 지분이 곱절로 늘어나면서 동시에 잠자고 있던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자사주의 마법이 완성되는 것이다. 대주주 의결권이 커진다는 건 곧 소액주주들의 의결권이 약해진다는 뜻이다. 한때 주주 모두의 공동 재산이던 자사주가 희한하게 대주주의 이익에 복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편법을 막는 법이 국회에서 발의되었다고는 하는데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모든 투자자가 관심 갖고 어떤 방식으로든 주주로서의 의견을 표명해야 한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처럼 주주의 당연한 권리를 제 스스로 주장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챙겨주지 않는다.

나는 자사주 비율이 10~20퍼센트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비율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결정이 주주 전체에게 이익이 가는 방식으로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기업의 대주주가 20퍼센트의 지분을 갖고 있다고 치자. 적은 지분은 아니지만 경영권을 확실하게 방어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야금야금 기업의 이익으로 자사주를 사서 그 비율을 50퍼센트까지 높였다고 하자. 그러면 의결권이 있는 주식은 5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그 결과 대주주의 실질적인 의결권은 40퍼센트로 뛰게 된다.

이렇게 주식회사의 약속을 어기는 방식으로 의결권을 높인 대주주가 주주들의 이익에 관심 있을 리 없다. 기업을 지키기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자사주를 사들여 의결권을 높인 후 소액주주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대주주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강화된 의결권을 제 뜻대로 마음껏 휘두르는 대주주가 더 많다.

2018년 미국의 애플사는 1000억달러 어치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했다.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이렇게 기업의 곳간을 비웠다가 새로운 사업 기회를 발견하면 어떻게 대처할까? 그럴 때는 증자를 하면 된다. 여기에서 우리나라 기업들과의 결정적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기업이 증자를 한다는 공시가 발표되면 주가가 하락한다. 투자자들이 경영자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우리와 달리 증자가 쉽다. 우리나라 투자자들의 불신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대주주이자 경영자가 불신을 초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증자를 한 기업들이 의욕적으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어 성과를 냈다면 지금과는 다른 문화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사실 미국과 같이 경영자와 투자자 간에 신뢰관계가 구축되기를 바란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그저 자사주를 대주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쓰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든 제도에는 허점이 있다.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은 참으로 성실하게 허점과 이를 이용할 방법을 찾아낸다. 그 성실함의 주역은 기업으로부터 월급을 받는 똑똑한 사람들이다. 그 똑똑한 사람들이 대주주 개인이 아닌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바람과 상관없이 그들은 꾸준히 성실할 것이다. 그러니 제도 보완 역시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이뤄져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