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아우슈비츠 수용소서 일본제국주의 ‘만행’을 떠올리다
[아시아엔=<아시아엔> 칼럼니스트, 전 <원주문화방송> 기자] “순간 심장이 정지하는 듯 했다. 아우슈비츠는 하나의 ‘개념’이었다. 무시무시한 가스실, 화장터, 집단살인 등 개념의 총체였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폴란드말로 ‘오시비엥침’, 버스 차창 너머로 표지판이 보였다. 긴 여행에 지쳐 구부정했던 허리가 저절로 세워진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라는 말에 옆에서 졸고 있던 아이가 눈을 번쩍 뜬다. 지난 여름 아이와 함께 동유럽을 돌아보고 있었다.
문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매표소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다. 수용소가 생긴 1940년부터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기까지 5년간 무려 1백만명 넘게 학살된 참혹한 현장. 그로부터 74년이나 지난 지금, 이들 입장객들이 보려는 것은 무엇일까? 또 내가 보려는 것은 무엇일까?
ARBEIT MACHT FREI
곳곳에 감시탑과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고, 녹슨 철문 위에는 “노동을 통해 자유를!”란 뜻을 담은 문구가 달려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매일매일 동료의 시체를 불태우고 처리하는 게 일상이었던 이들에게 이보다 더한 기만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한편으론 섬뜩한 위협을 담은 메시지 같기도 하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고, 그래야 삶을 마감할 수 있는 ‘자유’ 아닌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는···.”
지옥 문이나 다름없는 그 철문 옆에선 날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있었다고 한다. 머리가 박박 밀린 채 흙투성이가 된 죄수복을 입고 아름다운 교향악을 들으며 지옥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나치는 그렇게 비참, 공포, 슬픔 등 인간존재의 맨 밑바닥에 깃들어 있는 순수한 감성마저도 철저하게 조롱하고 유린했다.
전시관에는 끌려온 이들이 벗어 놓은 안경과 가방, 구두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잘린 머리카락도 방 한가득이었다. 이불 충전재로 쓰기 위해 모아 놓았다고 한다. 쌍둥이들을 골라내 한명에게 소금물 등을 주입해 죽으면 나머지 살아있는 한명마저 살해, 해부하며 둘의 차이를 비교했다는 생체실험실도 있다.
피골이 상접한 채 멍하니 카메라를 응시하는 피해자들 사진이 줄줄이 걸려 있다. 731부대와 남경 대학살 등 일제가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곳곳에서 저지른 만행이 떠오른다.
가이드 말로는 독일 학생들이 가장 많이 다녀가는 수학여행지가 바로 이곳 ‘아우슈비츠’라고 한다. 며칠씩 머무르며 2차대전 당시 자신의 선조가 저지른 잘못을 직접 보고 듣고, 사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국가의 미래를 위한 가장 좋은 교육이라는 판단에서다.
돌계단이 반들반들 닳아서 발자국이 찍혀 있을 정도로 세계 각처에서 수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누구는 그냥 유명한 곳이어서, 또 다른 누구는 역사의 교훈을 얻기위해, 각각의 이유와 명분을 지닌 채 말이다. 그런데 일본인은 눈에 띄지 않는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알게 모르게 국가차원의 압력을 느껴 몇몇 개인을 제외하고 단체는 거의 오지 않는다고 한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유태인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한 이후 독일은 기회 있을 때마다 총리가 나서서 과거사를 사죄하는 것은 물론 매년 종전기념일엔 폴란드에 외무장관을 보내 반성의 뜻을 전하고 있다. 독일은 지난 여름 종전일에도 유태인 학살에 대한 사과의 뜻과 함께 홀로코스트 생존자 수천명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국제사회가 이에 지지를 보냈음은 물론이다.
과거사에 대한 배상은커녕 이를 왜곡하고 전범을 추모하는 나라의 최장수 총리 ‘아베’의 정권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Those who do 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과거사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되풀이하게 된다)
수용소 입구에 써있는 문구다. 지금의 우리 현실을 돌아본다. 가슴이 서늘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