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선의 산중한담] 마을회관서 요가선생을 하다 보니···.

마을회관에서 노인들이 요가명상을 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사람이 필자

[아시아엔=이형선 전 원주문화방송 기자] 넓은 홀안에 가부좌를 한 사람들이 두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다. 천천히 어둠이 깔리고 정적도 깊어진다.

“오늘 하루도 지금과 같은 편안한 마음으로 잘 마무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하자 박수가 쏟아진다. 눈을 뜬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내 마음에도 환희심이 인다.

“아니 기자하던 사람이 이런데서···. 왠 요가에요?” 모든 걸 접고 산속에 들어와 산 지 10년이나 됐지만, 아직도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농한기인 요즘 나는 마을회관에서 일주일에 두번 요가를 가르친다. 기자 시절 요가강사 자격증을 따놨는데, 수련도 할 겸 이른바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수요일엔 마을 할머니들에게, 금요일엔 고아원 아이들에게.

맨날 농사일만 하는 시골 할머니들이 요가를 얼마나 따라 하겠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20~30대 못지 않게 두팔, 두다리 쭉쭉 올라간다. 열의도 대단해 웬만해선 빠지지 않는다. 평균 10명 정도는 빠지지 않고 오시는데, 이 정도면 출석율이 아주 높은 편이라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결석자가 생기면 미안해하신다. 아마도 무료라서 더 그런 것 같다.

봉사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도 우리 몸의 면역력이 높아지는 걸 ‘마더 테레사 효과’라고 하는데 요가를 통해 한결 맑아지는 얼굴들을 보는 것 자체가 내게는 큰 축복이다.

반면, 금요일에 하는 요가는 천방지축이다. 방학이라 혹시 요가를 배우고 싶은 아이들이 있을까 싶어 아동복지시설에 물어 봤더니 8명이 신청을 했다. 초등부터 고등학생까지 무조건 다 받았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후회막급이다.

아직 애기티를 못 벗은 초등학교 1, 2학년생들은 안아달라고 매달리고, 그보다 좀 큰애들은 요가 대신 팔짝 팔짝 재주를 넘으며 묘기자랑을 한다. 중고생들은 그런 아이들의 군기를 잡는 체 하면서 더 심하게 장난을 친다.

“요가는 마음의 작용을 그치는 것이다”라는 요가수트라의 가르침은 온데 간데 없이 내 목소리는 점점 하이톤이 되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할머니들의 유연한 몸동작은 바로 맘의 반영이다

겨우겨우 수업을 마치고, 얘기 좀 하자고 둘러 앉히면 “이제 나가서 놀아도 되나요?” 하면서 보챈다. 아이들의 목적은 딴 데 있었다.

요즘엔 아동시설이 일반 가정집처럼 주택형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야외에 놀이터가 따로 없다보니 방학 땐 거의 실내에만 갇혀 지내게 된다. 그러다 보니 답답한 아이들은 잠시라도 바깥바람을 쐴 요량으로 요가를 신청한 것이었다. 한창 뛰어 놀 나이에 놀이터에 마음을 뺏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님! 저 좀 보세요.”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구름사다리를 타고, 철봉을 하고, 공을 차면서 잘도 논다. 밝은 햇살 아래 아이들의 얼굴이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빛난다.

요가 수행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소우주와 대우주의 통일, ‘mindfulness’가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그 모습을 보면서, 굳이 요가가 아니어도 되는데···. 괜히 아이들만 괴롭힌 게 아닌지 미안하다.

그러면서도 한켠에선 “이 아이들을 어떻게든 휘어잡아서 제대로 가르쳐봐야지” 하는 ‘요가선생’으로서의 욕심이 또 고개를 든다.

몇 년 전 독일에서 내전으로 피폐해진 르완다를 돕기 위해 한 마을에 우물을 파주었다고 한다. 물을 긷기 위해 하루 4km를 오가야 하는 부녀자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우물은 폐쇄되고 말았다.

그 옛날 우리네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물을 길으러 오가며 뒷담화를 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낙이 사라지자, 마을의 부녀자들 스스로 우물을 폐쇄해 버린 것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들 입장에서 헤아려 보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봉사를 하려면 두가지를 알아야 한다. 그의 필요, 나의 능력” 아이반 패닌의 말이다.

불교에서는 선행을 베풀려면 이른바 ‘무주상보시’(無住相報施,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하는 행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을 베풀면서 그 속에 ‘나’라는 상이 있으면 그것은 자기과시에 지나지 않으며 아무리 좋은 일도 과보를 받게 되고, 결국 업으로 남게 된다고 한다.

지금 나는 봉사를 위한 봉사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꼭 최선의 결과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닐진대, 나는 성과를 위한 성과에 집착하는 습(習)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나마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마을사람들과 아이들이야말로 나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깊은 밤 치악산 자락 집마당을 훤히 비추는 달빛을 바라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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