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선의 산중한담] 어린시절 못 잊는 울엄마와 까뮈의 ’최초의 인간’
[아시아엔=이형선 원주mbc 전 기자]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던 길이었다. 애완동물 가게를 지나던 어머니가 발걸음을 멈추고 안을 한참 들여다보셨다. 뭔가 하고 봤더니 곱게 치장한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유리상자 속에 칸칸이 갇혀 있었다.
‘···. 반려동물이라도 키우고 싶으신 걸까?’
겨우 숨구멍만 몇 개 뚫어 놓은 우리 속에서 동물들이 얼마나 답답할까? 생각하면서 옆에 서 있는데, “너네는 좋겠다···” 어머니가 혼잣말을 하셨다.
‘설마, 잘못 들었겠지···’ 하는데, “얼마나 좋니? 가만히 있어도 남들이 다 알아서 씻겨주고 빗겨주고, 공주처럼 예쁘게 앉아만 있으면 되는데···.”
어머니는 정말 부러운 표정이셨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진종일 갇혀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감시당하고 이사람 저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게 뭐가 좋단 말인가?
동물학대라고 항의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에 갇혀 있는 동물을 부러워하는 마음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난한 집안의 홀어머니밑에서 아주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맡아하며 일찌감치 애어른이 돼야했던 어머니의 지난한 삶이 떠올랐다.
오빠들도 일하느라 학교를 못 가는데 계집애가 무슨 공부냐며 야단치는 걸 몰래몰래 도망쳐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머니. 또래들보다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가 간신히 한글을 떼고, 상급반에 진학했는데, 선생님께서 일기를 써오라고 해 난생처음 이렇게 쓰셨다고 한다.
‘오늘도 날씨가 좋았습니다. 하루 종일 애기를 업어 주었습니다.’
오빠가 둘이나 있었지만 일기가 뭔지 아는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그날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적었는데 “이게 뭐냐”며 선생님께 야단만 맞았다고 어머니는 억울해 하셨다. 그래도 악착같이 공부해서 유급되지 않고 먼저 입학한 동갑내기들과 한해에 졸업하셨다고 한다.
산으로 들로 한창 뛰어놀 나이에 하루 종일 갓난애를 들쳐업고 발을 동동 구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를 애태웠던 아기는 또 있었다. 엄동설한 피난길에 외할머니가 등에 업은 동생이 괜찮은지 보라고 해서 포대기를 들췄더니 꽁꽁 언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슬프다기보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작 여덟살 짜리가 어느새 어른 아닌 어른이 돼 버리고 만 것이었다.
알베르 까뮈의 소설 <최초의 인간>에 나오는 자크가 떠오른다. 자신을 낳자마자 징집돼 전사한,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 무덤 앞에서 자크는 자신보다도 한참 어린 스물아홉 살 청년의 죽음과 대면한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40여년 세월을 살아낸 그가 무덤 앞에서 느낀 것은 아버지를 그리는 아들의 마음이 아니었다. 그건 ‘억울하게 죽은 아이 앞에서 다 큰 어른이 느끼는 기막힌 연민’이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니체가 말했던가?
어찌 우리 어머니뿐이랴. 고난의 세월 속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갑자기 어른이 돼 버린 사람이.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생존해야만 하는 극한상황은 아이다움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시절 아이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혹독한 시절을 겪은 어머니가 ‘우리 안에 갇힌 동물’을 부러워하는 것은 가슴 한켠에 뻥뚫린 채 남아 있는 어린시절에 대한 회한 때문이 아닐까?
자식 앞에선 누구보다 강하고 힘 센 천하장사지만, 그 속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아이가 따뜻한 보살핌을 갈망하고 있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쩌다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부모세대에게 사회는 모성애와 부성애를 강요하면서 무조건적인 희생을 당연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즘 노인학대 신고가 한해 4600여건, 자식들에게 재산도 빼앗기고 버려지다시피한 노인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한다.
가족간 문제로 갈등을 겪는 이들에게 전문가들은 ‘심리적 거리두기’를 권한다. ‘모든 걸 당연히 베풀어야 할 가족’이 아닌 ‘타인’이라고 생각하면 인습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깨닫게 돼 저절로 관계가 회복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부모이기 전에 그들도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 그 여린 존재를 더 늦기 전에 등 뒤에서라도 따뜻하게 안아드리면 어떨까? 좀 쑥스럽더라도 말이다. 마침, 가정의 달 5월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