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선의 산중한담] 당신한테 ‘공돈’ 천만원이 생긴다면?
“아무도 모르게 지금 당장 공돈으로 천만원이 생긴다면 뭘 하시겠어요?” 요즘 듣고 있는 아동심리상담 수업에서 강사가 질문을 했다.
‘밤새 일등석을 타고 파리에 가서 제일 좋은 호텔에 짐을 푼 뒤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시고 싶다. 아침햇살이 스미는 거리를 내다보며 그 다음 뭘 할 지 천천히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파리근교에 있다는 수련이 가득 찬 모네의 정원을 둘러보는 건 어떨까? 공짜로 생긴 돈인데 다들 자신을 위해 쓰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수강생들의 대답은 세갈래로 나뉘었다. 나처럼 여행이나 쇼핑 등 자신을 위해 쓰고 싶다는 그룹, 자식이나 부모님·지인들에게 깜짝 선물을 해 주고 싶다는 그룹, 만일에 대비해 저축을 하거나 대출금을 갚고 싶다는 그룹이 있었다.
질문에 앞서 힘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를 파악하는 성격검사를 했는데, 바로 그 유형에 따라 공돈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생각이 나뉘었다. 성격유형은 크게 세가지로 나뉘는데 나처럼 자기중심적 결정을 한 사람들이 ‘장형’, 관계중심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가슴형’, 미래중심적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머리형’이다.
“자신의 묘비명에 무엇이라고 적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도 장형의 사람들은 “후회없이 살아라” 등의 지시문으로, 가슴형은 “가족 등 친지에게 고맙다” 등의 감사문, 머리형은 “계획을 세워 앞으로 잘 대비하라”는 당부의 글이라고 답했다.
생각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니···. 똑같은 말이라도 어떤 유형의 성격이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내 입장에서 도와주려고 한 것이 상대의 성격에 따라 지나친 간섭이나 강요로 받아들여져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나름 충고랍시고 했던 말들이 결국은 내 의도대로 상대를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속성을 가진 ‘장형’ 특유의 심리에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 지난 날을 돌이켜보니 솔직히 “아니다”라고 부인하기 어려운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졌다. 거기다가 앞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지? 하는 생각과 함께 자존감이 뚝 떨어지면서 아득해졌다.
어찌 성격뿐이랴. 각자 처한 상황과 처지에 따라 사회가 함께 추구해야 할 ‘최선’(最善)에 대한 생각도 천차만별로 갈라질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복잡한 심리와 상황 속에서 어떻게 ‘소통’을 할 것인가? 심리학자들은 제일 먼저 이뤄져야 할 것이 바로 ‘공감’(共感)이라고 말한다. 공감이란 “나의 의도를 내려놓고, 내가 아닌 바로 ‘그 사람’이 되어 그 자리에 서서 함께 느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면 “왜? 뭔가 문젠데?” 하고 다그치는 대신 “그래, 지금 학교 가기 싫구나” 하고 아이의 마음을 먼저 읽어주는 것, 이것이 공감이다. 그 다음에 귀 기울여 듣는 ‘경청’(傾聽)이 따라야 한다.
심리학자인 칼 로저스(Carl Rogers)는 “누군가 자신을 진심으로 공감해 줄 때 스스로에 대한 높은 존중과 사랑을 경험하게 돼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된다”며 ‘공감의 치료효과’를 역설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慈悲)도 결국 깊은 ‘공감’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직장 내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를 다투다 너무 힘들어 주저앉았다가 “형선씨 정말 힘들겠구나!”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섰던 적이 많았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결국 어려움을 떨치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던 큰 힘이 됐던 것 같다.
칸느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기생(寄生)과 상생(相生), 공생(共生)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족간, 또래간, 계층간, 세대간의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것도 서로의 입장만 강요할 뿐 공감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말로만 소통을 외치고 갈등을 부추기면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막말을 일삼는 일부 정치인들을 보노라면 국민들을 상생(相生) 아닌 상극(相剋)으로 몰아가는 것 같아 속이 터진다.
진정한 소통은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서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그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음에 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상생이 곧 공생이고, 공생이 곧 상생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