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선 산중한담] 올 여름 최고의 피서법···배우고 익히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단원 김홍도의 ‘서당’

[아시아엔=이형선 전 원주mbc 기자] “爲善者는 天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는 天報之以禍니라.”(착한 일을 하는 이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하는 이에게는 하늘이 화를 내린다)

또랑또랑 글 읽는 소리가 빗소리에 실려 산중에 퍼진다.
정말 글 속 문장처럼 그러한가? 지난 세월 돌아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선과 악은 무엇이며, 복과 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늘은 또 무엇인가?

기준이 ‘나’인가, ‘세상’인가에 따라 선과 악, 복과 화도 달라지는 게 아닐까?

아들이 초등학생이 되어 처음 맞은 여름방학, 더운데 돌아다니기도 힘들고, 뭘 할까? 고민하다 함께 ‘명심보감’을 공부하기로 했다.

예전에 읽었지만 몇년만에 다시 보니 구구절절 의미가 또 새롭다. 당연한 듯 지나쳤던 말들을 몇 번이고 곱씹어 보게 된다.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하루에 딱 세 문장씩만 읽고 외우는데, ‘아, 이래서 學而時習之면 不亦悅乎아’(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했구나! 선풍기 바람에 저절로 文理가 트이는 듯하다.

학교 다닐 땐 그렇게 지긋지긋했는데, 이젠 아무도 공부하란 소리를 안 하니 오히려 더 하고 싶어진다. 문과생이라는 것을 핑계로 고등학교 때 일찌감치 포기했던 수학과 물리도 다시 그 근원을 따져가며 차근차근 풀어보고 싶다.

그래서 한동안 인터넷(K-MOOK)에서 하는 ‘현대물리학’ 강의를 듣기도 했다. 그 방면에 워낙 기초가 없고 평소 안쓰던 머리를 쓰자니 녹슨 기계를 돌리듯 삐걱댔지만 그래도 시험 때 대충 제목만 외우고 지나갔던 법칙을 세세히 알게 되니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내비게이션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이용한 것이라는 것,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어 있는 고양이(?)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양자역학을 역설적으로 설명해주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마음이 동해 고전무용을 배운 적도 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숙명여대에 계셨던 정재만 교수님에게 살풀이춤을 배웠는데, 난생 처음 춰 보는 춤을, 그것도 무용을 전공한 대학원생들 틈에서 배우느라 진땀을 흘렸다.

기본스텝은커녕 옷고름 매는 법조차 몰라 나도 모르게 저고리가 풀리기 일쑤였다. 능수능란한 춤꾼들 사이에서 나혼자 우왕좌왕 하다보면 졸지에 바보가 된 듯 창피한 마음에 그만 두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 어쩌면 진짜 공부’라는 생각이 들어 꾹 참고 하다 보니 정해진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가야금도, 요가도, 참선도 다 그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먼저였다. 그저 하면 될 것을, 누가 다그치는 것도 아닌데 늘 더 잘 하려고 스스로 경쟁하는 마음을 내는 바람에 더 쉽게 좌절했던 것 같다.

工夫란 무엇인가? 본래는 도와서 성취한다는 뜻의 功扶였는데, 나중에 工夫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고, 불교에서 참선을 열심히 하여 불도를 닦는다는 의미의 做工夫(주공부)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본래의 뜻이 무엇이든, 뭘 정확히 이해하고 습득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직 모르는 게 많구나’ 이걸 깨닫는 것이 ‘공부’가 아닐까?

전에 홍역학회를 설립한 대산 김석진 선생님에게 주역을 배웠는데 강의가 끝나고 질문을 받는데, 아무도 질문하는 이가 없자, “뭘 알아야 질문을 할 텐데···. 자신이 뭘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는 것 아니냐”며 탄식하신 적이 있었다.

복잡한 세상사, 풀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더위 때문에 만사가 귀찮다면, 그동안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면서 피서(避暑)를 하면 어떨까?

많이 배우고 뜻을 튼튼히 하고, 잘 묻고 잘 생각하면 인(仁)은 그 속에 있다고 공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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