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원불교 신도의 ‘잘 죽고 잘 사는 법’

티베트 승려가 기도를 하고 있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내가 원불교에 귀의(歸依)한 후 수십년 동안 죽음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생사에 대한 연마를 계속해 왔다. 그런 나도 꿈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경우 공포감에 사로잡혀 한사코 거부하는 것을 보면 해탈(解脫)은커녕 생의 애착이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외면하려 든다. 그래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들 한다. 가난에 찌들어도, 천대를 받아도, 이승이 좋다며 삶에 대해 강렬한 애착을 지닌다.

그렇다고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것은 ‘제명대로 못 살고 원통하게 죽는 것’이다. 일찍 죽는 것은 요사(夭死), 객지에서 죽는 것은 객사(客死), 횡액으로 죽는 것은 횡사(橫死), 원통하게 죽는 것은 원사(寃死), 분하게 죽는 것은 분사(憤死), 이 모두가 억울한 죽음이다.

그럼 어떤 죽음이 바람직할까? 하늘이 내리신 명(命)대로 오래 살다가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자리에 누워 죽는 와석종신(臥席終身)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한다. 억울하게 죽으면 원귀(寃鬼)가 된다. 원귀는 저승에 가서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구천(九天)을 떠돌게 된다고 한다. 무속(巫俗)에서는 죽음이란 저승사자를 따라가는 일이라고 한다.

사람은 잘 죽든 잘못 죽든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실상은 삶과 죽음은 하나다. 다만 자리를 옮길 뿐 생사가 없는 것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는 “태어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다”(不生不滅)고 하였다.

그리고 ‘더럽혀지지도 않고 깨끗해지지도 않고(不垢不淨)’, ‘더해지지도 않고 덜해지지 않는다(不增不减)’고 하였다. 또한 ‘드디어 늙음도, 죽음도 없고 또 늙음과 죽음이 없어지지도 않게 되는 데 이르는 것이다’(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라 하였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實體)가 없으며, 따라서 낳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사그라져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며, 그러므로 더럽혀진 것도 깨끗한 것도, 더해졌느니 덜해졌느니 따질 것도 없다는 것이다. 실체가 없으니 물질적 현상이나 감각이나 표상이나 의지·지식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눈도 코도 귀도 혀도 몸뚱이도 없다. 그러니까 늙음과 죽음이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라, 처음부터 구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마음가짐을 청정일념(淸淨一念)으로 만들어 삼세인과(三世因果)에 이끌리거나 얽매이지 않는 수행에 전념해 생사에 해탈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음에 다다라 육신이 진정한 ‘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이 모두 공(空)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비로소 세간을 벗어난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에서 익힌 매듭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다시 얽매임으로 인해 고해(苦海)에서 해매게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蟬脫) 훨훨 벗어 던지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낡은 허물을 벗는 것이 죽음이며,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윤회(輪廻)다. 다만 새로운 옷이 무슨 빛깔이 되고, 어떤 모습이 될지는 이승의 업(業)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내생에 좋은 집에서 태어나 좋은 옷 입고, 좋은 몸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이승에서 쌓은 공덕(功德)의 크기에 달렸다. 그 공덕은 바로 정신·육신·물질로 쌓는다. 잘 살면 잘 태어나고, 잘못 살면 또다시 이생에서처럼 내생도 괴로운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첫째, 착심(着心) 두는 곳이 없이 걸림 없는 마음을 늘 길들여야 한다.

둘째, 생사가 거래(去來)인 줄을 알아 생사를 초월하는 마음을 길들인다.

셋째, 마음에 정력(定力)을 쌓아서 자재(自在)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넷째, 평소에 큰 원력(願力)을 세워 놓아야 한다.

이렇게 이 네 가지를 평소에 연마하여 놓는다면 사는 일은 물론이요, 죽어 가는 길에도 그렇게 아쉽고 당황하지 않게 수월스럽게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사를 연마하는 도요, 생사를 해결하는 큰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