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경찰 NYPD 탄생⑦] 뉴욕 ‘주지사파’와 뉴욕 ‘시장파’ 편 갈려 ‘유혈충돌’도
[아시아엔=김중겸 전 경찰청 수사국장] 공화당 주지사는 민주당 시장이 못마땅했다. 뉴욕주는 공화당이 장악했다. 뉴욕주 안의 자치단체 뉴욕시는 민주당이 좌지우지했다. 공화당 주지사 눈에 민주당 시장은 부패의 심벌이었다.
주지사는 시장을 길들이기로 작정했다. 뇌물관행 없애려고 했다. 부정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제일 먼저 경찰을 고치기로 했다. 1845년 7월 1일 창설 이래 13년 동안 불법으로 얼룩진 Municipal Police가 첫 타깃 됐다.
1857년 6월 16일 Municipal Police 없애고 대신 Metropolitan Police 만드는 법률 제정했다.
관할구역은 확대했다. 기존의 맨해튼에 주위의 브롱크스, 브루클린, 스태튼 아일랜드를 포함시켰다. 경찰인력도 흡수시켰다.
주지사가 임명한 경찰위원회board of commissioners가 관리하게 했다. 시장의 경찰에 대한 영향력을 축소하는 수단이었다.
민주당 시장, 공화당 주지사에 저항
공화당 주지사는 Municipal Police 해체했다. “경찰관 생활 계속하려면 Metropolitan Police로 빨리 오라. 재임용하겠다.”
민주당 시장 Fernando Wood는 “주지사면 다냐. 멀쩡한 우리 뉴욕시 경찰을 왜 없애는 거냐. 해산 못하겠다” 버텼다.
기존의 민주당계 Municipal Police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시장에게 여전히 충성하겠다는 경감 15명과 경찰관 800명. 뮤니시팔에 잔류.
남아봤자 결국 실업자 되기 십상이다. 주지사가 만든 메트로폴리탄으로 갈아타자. 경감 7명과 경찰관 300명이 이적했다.
선택기준은 출신과 종교. 잔류파는 새로 이민 온, 주로 아일랜드인과 천주교도였다. 이적파는 오래 전에 온 영국과 독일과 네덜란드 사람들 후손. 그리고 개신교도.
서로 싸우는 한 도시 두 경찰
한 경찰국 청사, 한 경찰서 청사에 두 경찰이 동거했다. 서로 티격태격했다.
시장파 경찰관이 지사파 시민 체포해 오면 지사파 경찰관이 탈취해 풀어줬다. 당연히 지사파가 잡아온 시장파 위반자를 시장파가 빼냈다.
경찰관 인종구성과 지지기반이 달랐기 때문이다. 시장파는 아일랜드인 경찰관이 많았다. 지지기반도 아일랜드인. 아일랜드인 범죄 눈감아줬다.
주지사파는 영국과 독일과 네덜란드계다. 자기 모국출신 시민의 위반행위는 뻔히 보고도 못 본 체 했다. 아일랜드인은 열심히 잡아들였다.
범죄자만 신나는 세상 됐다. 주지사파 경찰관이 아일랜드계 갱 잡아온다. 잡힌 쪽에서는 시장파 경찰관에게 달려가 돈 건네며 빼내 달라 한다.
돈 손에 쥔 시장파 경찰관은 떼 지어 몰려가 주지사파 경찰관 습격한다. “야, 니들 왜 우리 사람 잡아 가냐.” 빼내간다. “또 그러지 마! 알았지?”
시장체포 둘러싼 두 경찰의 유혈충돌
마침 뇌물소문 나돌았다. 시장 우드가 도로국장 임명하면서 5만달러 받았다는 내용이다. 주지사, “옳거니. 즉각 시장 잡아넣자.” 경찰문제도 풀린 테니···.
1차 체포시도는 1857년 6월 16일 15:00. 주지사파 메트로폴리탄경찰관 조지 웰링 경감이 혼자 시장체포영장 들고 시장실로 갔다.
동행 요구하자 시장 거부. 다퉜다. 이 소리에 시장파 뮤니시팔경찰관 몰려들었다. 300명!
몇 명이서 웰링 경감 번쩍 들어 올려 끌고 나갔다. 시청현관계단에서 냅다 던져버렸다. 데굴데굴 굴렀다. 많이 다쳤다.
2차 체포시도는 16:00. 웰링 경감 절뚝거리며 지원부대 경감 2명과 경찰관 50명 데리고 시청으로 들어가려했다.
시장파 경찰관 300명 외에 시장 지지하는 아일랜드 사람 200여명이 진치고 있었다. 시청 앞에서 격돌, 30분간 난투극 벌어졌다.
53명 대 500명의 대결. 주지사파 중과부적. 얻어맞고 후퇴. 53명 부상. 그 중 1명은 장애인 됐다. 시장과 지지자들 환호 속에 축배!
이 소동은 히스토리가 됐다. 뉴욕경찰폭동New York City Police Riot 또는 경찰폭동the Great Police Riot로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