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에 세운상가에서 지게와 군대 시절 추억을 찾다

지게는 21세기 3번째 10년대에도 화물과 지게꾼의 삶의 짐을 지고 갈 것이다.

[아시아엔=김중겸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전 경찰청 수사국장] 요즘 내 얘기는 보통 30~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를 만난 게 1976년, 43년 전이다. 나는 서른 살 중앙관청의 계장이었다.

그는 우리 과장의 운전요원이었다. 스무살 갓 넘은 나이. 성실하고 정직했다. 차관 운전기사 구할 때 추천, 취직됐다.

몇년 운전대 잡았다. 내가 보기에 영구직업은 되지 못했다. 야, 이제 슬슬 니가 갈 길 가야 하는 거 아녀? 전자계통 기술에 밝았다. 후임 운전자 구하자 바로 세운상가 전자부품 가게에 들어갔다.

밑바닥부터 배우기 시작, 한 십년 걸려 내 점포 갖게 됐다. 몇 평 안 된다. 그래도 기계며, 부품이며, 몇 억 훌쩍 넘었다. 제법 벌었다. 벌기도 하고 날리기도 하고

세운상가의 명암

오락기계가 마구 팔려나가던 시절이었다. 떼돈들 벌었다. 한몫 잡을까 뛰어들었다. 끝판이었다. 집중단속에 탈 탈 털고 빈손으로 나왔다.

그런 인생의 전기마다 내 사무실 찾아왔다. 그래도 공무원이네요. 계장님. 계장 때 만났으니까 내가 과장이어도 그의 입에서는 계장소리만 나온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5년 전 7월 23일 전화 왔다. “계장님! 시간 있으세요?” “상가 조문 가는 중이다. 날도 더운데 냉면이라도 먹을까?” “네. 그렇게 해요.” “11시반에 만나자. 중구청 정문 앞에서 만나자.” 거기서 만나 오장동 냉면집 갔다. 몇 년 만에 먹는 본고장 음식인가! “네 덕이다!?

코 뾰족, 그 뒤로 넓게 하얀 얼굴, 이국적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알랭 드롱이라 불렀다. “제가요?” “그래 프랑스 명배우 닮았다!” 좋아했다.

큰 돈 못 벌어도

“목동에 아파트, 을지로에 아파트, 내 가게. 먹고 살만 해요. 많이 번 사람들, 더 벌려다가 쪽박 찬 경우 많아요. 사업이란 게 그래요. 이 정부가 권장했다가 저 정부가 등 돌리고. 그러면 망하는 거죠. 제일 편한 게 정치가 아니겠어요? 입으로만 사니까요.”

그러다가 화살이 내게로 향한다. “계장님이야 원체 돈이나 부동산 뭐 그런 거 몰라라 하고 살았잖아요.”

“야, 내가 그랬냐.” “그랬지요. 근근이 살고. 그만 두고서는 30년 넘게 일한 서울 떠나 지방 가서 사시니···. 사모님 속 꽤나 썩히신 거죠.”

“그래도, 저는, 계장님! 서울시에서 세운상가에서 나가라, 나가라 해도 버틴 덕에 아직 여기서 먹구 살구요. 계장님 놀지만, 저는 창창하잖아요.”

그러다가 봤다, 세운상가 그 지게

냉면 먹고, 커피 마시고, 종묘 쪽으로 걸어갔다. 아, 거기에 그게 있었다. 지게다. 이 미로같은 전기전자상가 누비기에 딱 알맞은 지게였다.

그걸 보자 옛 생각 절로 났다. 다리 없는 지게 곧 공사工事지게 지던 시절이었다. 젊디젊은 20대 초반이었다.

북한이 땅굴 팠다. 우리는 산꼭대기에 굴 팠다. 육군 김 상병과 그 동료들, 아침밥 먹고 지게 졌다. 시멘트 한 포대 올려놓고 산 탔다.

저 높은 산 정상 굴 공사장에 당도하면 11시. 손목에 오전 지게지기 임무완료 도장 받는다. 산 내려가 식당에 팔 내밀면 점심 준다. 오후에는 5갤런 스페어 캔에 물 가득 담아 지게에 지고 올라간다.

거기서 또 팔목에 도장 쿡. 저녁밥 보증하는 증표다.

덩 덩 덩더꿍

한 주 되자 임무교대다. 반합에 점심밥과 국 담아 산꼭대기 올라간다. 종일 굴 판다. 수평으로 20여m 파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리 중대는 파낸 흙이 없냐?” “아따, 중대장님도 참 답답허네요. 우째 그리도 모르신담요.

이거, 다 파내서 굴 만들면 그만 둘 건 감유? 또 하나 더 파라고 아우성칠 거 뻔하잖유. 그러니, 마, 한달 쯤 걸려 하나 팝시다.”

굴에 들어간 파내기 조. 벽 치는 소리 우렁차게 울린다. 그러나 삽으로 흙 파내면 소리 크게 나지 않는다. 그저 벽치기만 하니까 소리 크다. 이쪽 벽에 야전삽 냅다 친다. “덩~~~” 울려 퍼진다. 저쪽 벽에 대고 친다. “덩~~~” 에밀레종이다.

돈 벌러 가서 죽고

완장 찬 사단 감독관. 절대로 굴 안에 들어가 확인하지 않는다. 들어갔다가 무너져 내리면 어떡 혀. 나 죽는 거여.

들어가시죠. 어이구, 이 사람. 김 대위, 어딜 들어가라는 거여. 밖에서도 충분해. 중대원만 들어가서 덩, 덩, 덩더꿍. 밖에서 그 소리만 듣는다.

그러면서 말하길 “거, 참, 이 중대는 역시 달라. 모범이야. 중대장! 사단장에게 보고해서 중대본부 1주일 작업면제 되게 하겠네.”

“감사합니닷! 박 중령님!” 극진히 배웅한다. 중대원들 입은 삐죽 나온다. 작업면제? 그러면 전술훈련 받아야 하잖아! 더 골치 아프다.

그런 우리 중대. 중대장은 월남 가자마자 전사. 아무리 일가친척 하나 없는 천애고아라지만 인생이 이래서야. 모두 그 소식에 울었다.

군대 와서 위장병 고쳤다는 이 일병. 목숨과 바꾸는 전투수당 몽땅 모아 논 사겠다더니 죽었다. 아연했다. 부대 앞산만 모두들 응시했다.

세운상가 옛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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