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탕 뚝 끊게 만든 스님의 한 마디···”김공(金公)은 견공(犬公)을 즐기시는구먼”
[아시아엔=김중겸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전 경찰청 수사국잘] 늘 강아지 생각이 들어 있었다. 그만큼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다. 이웃에서 밥 주며 노는 걸 보면 그리도 부러웠다.
어머니 졸라댔다. 집안에 호랑이띠가 있어서 안 된다 하셨다. 우겨댔다. 키웠다. 번번이 병들거나 집 나가곤 했다. 과연 우리 어머니!
첫 기관장 시절. 관내 미사일부대에서 군견 강아지 선물 받았다. 9개월 만에 서울로 발령 나서 놔두고 갔다.
나중에 궁금해서 물어 봤다. 똥개가 다 되어서 잡아먹었다는 소리 들었다. 원, 이거, 참.
서울 기관장 때다. 사무실 숙식이 관행이던 시절이다. 속옷만은 세탁소에 맡기기 뭣해 집에서 가져다 입었다.
어느 날 운전요원이 집에 다녀와서는 강아지가 있더라고 했다. 딸아이가 사온 치와와였다. 연이 닿지 않음 알 터인데 걱정이었다. 웬 걸 잘 컸다.
비행기 탄 견공 ‘콩알이’
도쿄 한국대사관으로 파견 나가게 되어 친척집에 맡겼다. 구석에 쭈그려 앉아 먹지도, 싸지도, 자지도 않고 울기만 하더란다.
도저히 못 맡겠다고 몇번 연락 왔다. 굶어 죽일 거 같다며 일주일 만에 데리고 왔다.
비행기 타고 가서 3년을 같이 살다 왔다. 작아서 ‘콩알이’라 불렀다. 별명은 너무 서둘러 대서 ‘서두리’였다.
법률상으로는 김서돌金舒乭. 도쿄의 거주지 관할 구청에 등록된 이름이다. 18년 함께 살고 영면했다. 사람 나이로 환산하면 18년×8배=144세.
내가 운전해 집 근처에 가면 엔진소리 듣고 벌써 알아챈다. 현관에 나가 낑낑댄다. 엄마야! 문 열어 줘. 아빠 오셔! sixth sense(육감)이 따로 없다.
유감스러운 유기견 처우
발발이가 길 잃어 사무실 마당으로 들어왔다. 초소 근무 청년들이 보금자리 만들어 키웠다.
‘포순이’라 이름 지어 애지중지 한단다. 집 떠나온 젊은이들이 정 붙이는 건가. 흐뭇했다.
나중에 들리는 얘기는 그게 아니었다. 전근 간 관서장이 좋아하는 개라며 괄시가 심했단다. 구두 발로 걷어차기도 했단다.
세상인심이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다더니 거 참, 이십대 젊은이들도 그런가. 덕기군이 불쌍하다며 집으로 데려갔다 한다.
수육 맛있게 먹었는데…
전방에서의 사병생활은 배가 고팠다. 취사반 형들에게 그 남는 누룽지 좀 달라했다. “어라 이 녀석. 이등병이 정말 겁 없네.” 하면서도 뭔가 잘 봐줄 구석 있었나. 누룽지 꼬박꼬박 건네주었다. 맛있게 얻어먹었다.
그게 지금까지 버릇으로 굳었다. 그럴 정도로 배가 고팠다. 논산훈련소에서는 안 그랬다. 내 부대까지 오는 동안에 기름기 다 빠져서 그랬나.
고등학교 선배인 정보장교 이상길 대위 따라 외출 나갔다. 수육 맛있게 먹었다. 부대에서 나오는 고깃국은 황우도강탕(黃牛渡江湯)이라 했다. 누런 소가 건너 간 강물 퍼다 끓인 건지 그저 멀건 국물만 줬다. 고기는 행방불명.
여하튼 고기가 귀한 시절이었다. 다 먹고 나자 개고기라는 거였다. 속이 불편했다. 결국 토해 내고 말았다.
스님의 이 한마디에 보신탕 뚝…“김공, 견공을 즐기시는구먼”
그로부터 한 십여년 후 계장 시절, 친구 김일수 하고 우연히 보신탕집 평양옥에 들렸다. 맛 들였다. 한 여름에 탕 100그릇 먹기 장정長征에 들어갔다.
친구 따라 원남동 보신탕 골목, 구파발 유명 보신탕 집 섭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절에 갔다. 스님 왈 “김공(金公)은 견공(犬公)을 즐기시는구먼”. 그길로 뚝!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