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조오현 2주기] “해골이야말로 우리의 본래 모습인 기라”
“스님은 위로는 국가 지도자로부터 시골 촌부에 이르기까지, 사상적으로는 좌우에 걸쳐 사람을 가리지 않고 교유했다. 때로는 가르치고 때로는 배웠으며 시대와 고락을 함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시인이기도 했던 스님은 한글 선시조를 개척하여 현대 한국문학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2019년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을 엮은 김병무·홍사성의 말입니다. 2018년 입적하신(음력 4월12일) 조오현 스님 2주기(6월 3일 신흥사에서 다례재)가 돌아옵니다. <아시아엔>은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에 실린 조오현 스님을 回憶하는 글들을 독자들께 전합니다. <편집자>
“아, 더 이상 거짓말할 곳이 없구나”
“좋은 말은 다 버리고 남은 말로 시를 쓰게”
[아시아엔=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형님, 빨리 내려오셔야겠습니다.” “좀 좋아지셨어?” “아니, 그게 아니고요. 지금 아주 위중합니다….”
강원도 양양에 사는 사제 김병무의 전화를 받은 것은 5월 26일 오후 4시경이었다. 놀란 가슴을 누르지 못해 허겁지겁하는 사이, 다시 전화가 왔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조금 전에 입적하셨어요.”
갑자기 사방이 하얘졌다. 거짓말 같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초파일 하루 전 만해마을에서 뵐 때만 해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열흘 넘게 단식을 하는 중이어서 얼굴은 수척했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차를 몰아 강원도로 내려가는 내내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언젠가 일요일 오후였다.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갑자기 지금 좀 다녀가라는 전화가 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어려워 얼른 거짓말을 꾸며댔다. “지금 전라도 광주에 내려와 있습니다. 올라가면 뵙겠습니다.” 거짓말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등산 중이라는 말은 단골 거짓말이었다. 스님은 아마 내 거짓말을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당신이 나를 놀래주려고 병무 사제와 짜고 거짓말을 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사제는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저녁 7시쯤에야 강릉 현대아산병원에 도착했다. 법구(法軀)는 이미 영안실에 이운돼 있었다. 잠자는 듯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문득 ‘아, 이제는 더 이상 거짓말할 곳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거짓말할 데가 없다는 것은 이제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 용서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돌아보니 스님을 의지해 살아온 세월이 50년에 가깝다. 처음 뵈었던 것은 1972년 가을쯤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없어진 <풀과 별>이라는 잡지에 ‘내원암’이라는 시를 보냈는데 유광렬 선생의 선고(選考)로 실린 적이 있다.
이미 1960년대에 <시조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었던 스님은 서울 나들잇길에 일부러 찾아와 특유의 소탈하고 느릿한 목소리로 격려해주었다. 그렇지만 나의 시작(詩作)은 그걸로 끝이었다. 지적 허영심이 많았던 때라 읽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 것이 많아 시에 전념할 수 없었다.
다시 뵌 것은 1977년 가을, 절집 은사였던 정호당(晶湖堂) 성준(聲準) 화상 장례식 때였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갑자기 특별한 곳에서 만나다니 여간 반갑지 않았다. 스님이 장례식에 온 것은 연유가 있었다.
일찍이 동진출가(童眞出家)를 했지만, 그때까지 계첩(戒牒)이 없었다. 양육사였던 인월(印月)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이었으나 대처(帶妻)로 실계(失戒)를 한 분이었다. 어수룩하던 시절이어서 대처승 상좌도 이 절 저 절에서 밥은 먹을 수는 있었지만, 승적이 없으면 강원이나 선방에 입방하지 못했다. 조계종 계단에서 발행한 계첩이 필요했다.
그러던 터에 어떤 인연이 닿아 1975년 무렵 설악산으로 성준 화상을 찾아 뵙고 입실건당(入室建幢)을 한 것이었다. 입실건당이란 법맥을 잇는다는 뜻이다. 스님의 새 스승이 된 성준 스님은 근대의 고승이자 33인의 한 분인 용성(龍城) 스님의 법맥을 이은 고암(古庵) 스님의 제자다.
고암 스님은 조계종 종정을 두 차례나 역임한 분이다. 법맥으로 따지면 성골 중의 성골인 셈이다. 그러나 스님은 성준 스님과 하룻밤도 자지 않고 헤어졌다. <증도가>(證道歌)를 쓴 중국의 영가현각은 혜능 대사를 만나 입실을 허락받고 하룻밤 자고 헤어졌다.
뒷사람들은 영가를 일숙각(一宿覺)이라 했다. 그런데 두 분은 하룻밤 자지도 않고, 한 번 보고 서로를 인정했다. 그야말로 목격전수(目擊傳受), 눈 한번 껌벅하는 사이 사자상승(師資相乘)의 법맥을 전승한 것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스님은 나의 사형이 되었다. 절집 말로 비유하면 반석겁의 인연이 성숙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은사스님이 남긴 빈자리인 신흥사 주지에 대사형을 적극 추천했다. 사형 사제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데다 시를 쓰는 스님이 주지를 한다면 어떤 멋진 일이 생길 것이 기대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스님은 뒷날 설악산 일대를 시와 선이 어우러지는 독특한 공간으로 바꾸어놓았다.
언젠가 스님은 그때 일을 들어 ‘니가 내 인생을 망쳤다’고 힐난한 적이 있다. 그때 주지가 안 됐으면 더 큰 시인이나 소설가가 됐을 것이란 말이었다. 그러나 속마음은 달랐다. 환속한 사제를 늘 피붙이처럼 각별하게 챙긴 것이 스님이었다. 스님이 신흥사 주지가 된 1978년 이후 몇 년간은 자주 뵙지 못했다.
나는 은사스님 49재를 마치던 날 사형 사제들 앞에 발우와 가사장삼을 반납하는 환계(還戒)를 하고 산문을 떠났다. 속한(俗漢)이 되어서는 결혼과 직장생활에 바빠 절집 근방을 기웃거릴 형편이 못되었다.
불교계로 돌아온 것은 1982년 직장을 <불교신문>으로 옮기면서부터였다. 아남산업, 한국기계연구소 같은 곳은 번듯한 직장이기는 했지만 일터로는 낯설었다. 복잡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신문사에 빈자리가 생겨 부처님 그늘로 되돌아온 것이다.
환귀본처(還歸本處)한 나는 자연스럽게 스님과 자주 만나 이런저런 심부름을 했다. 그 무렵 스님은 신흥사 주지를 내놓고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84년 귀국해 인사동에서 낭인처럼 지내고 있었다.
와중에 <서울신문>에 한 달에 한 번 대형칼럼을 썼는데 대학노트에 쓴 초고를 가져와 원고지에 옮겨 쓰는 일을 시켰다. 일이 끝나면 두둑한 수고비도 챙겨주었다. 아마도 신문사에서 받은 원고료에 얼마를 더 얹은 것 같았다.
추측건대 가난하게 사는 속가 사제를 도와주려고 일부러 일거리를 만들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스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그랬다. 오천원 어치 신세를 지면 만원 어치만큼 갚았다.
스님이 베푼 은혜를 헤아리자면 손가락 발가락이 모자란다. 그중에서 가장 고마운 일은 시를 쓰도록 이끌어준 것이다. 십몇 년 전 다니던 회사에서 물러나 이름뿐인 지방방송 책임을 맡고 있을 때였다. 인사차 들렀더니 갑자기 “요즘은 시간도 많을 텐데 평론이나 해보면 어떠냐?”고 했다.
덧붙이는 말씀이 “시를 쓰면 좋기는 한데 기자질 하느라 문장에 물기가 빠졌으니 그게 더 맞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은근히 약이 올라 “저도 물기 있는 글 쓸 수 있습니다. 한때는 시도 쓴 적 있습니다”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 “요즘은 시 안 쓰나?” 하고 되물었다.
할 말이 없어 우물대자 ‘절 한 채 짓는 것보다 좋은 시 한 편이 더 오래 간다’면서 ‘나이 먹어서 할 일 중 시 쓰는 게 최고’라고 미끼를 던졌다. 귓등으로 들어 넘겼는데 얼마쯤 뒤에 다시 뵈었더니 ‘시 쓴 거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다.
이런 채근이 자극이 돼서 나는 정말 ‘시 같은 것’을 쓰기 시작했고, 무슨 말 끝에 이걸 발설했다. 스님은 얼굴에 화색이 돌며 빨리 보고 싶다고 했다. 속내를 들킬 것 같아 차일피일 미루자 어느 날 전화를 했다. 만해축전 일로 메일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문서가 오가는지 시험해보려 하니 시 쓴 것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창피를 무릅쓰고 그동안 써둔 몇 편을 골라 보냈다. 한 시간쯤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읽어보니 그중 몇 편은 시가 될 것 같더구나.” 그리고 얼마 뒤 <시와시학>에서 연락이 왔다. 이가림 선생의 추천으로 시인이 됐으니 소감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스님은 김재홍 선생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던 것 같다. 엉터리로 시인이 된 나는 등단패를 받은 그날부터 등짝이 서늘해졌다.
시인 행세를 하자면 제대로 된 시를 써야 할 텐데 과연 내가 쓴 것도 시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구나 원고지 앞에 앉으면 막막해진다지만 시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럴 때는 속을 보여줘도 괜찮을 선배에게 묻는 게 답이다. 나는 용기를 내서 졸작 몇 편을 들고 찾아갔다.
“전에는 가져오라고 해도 머뭇거리더니 이번에는 제 발로 찾아오다니 시가 만만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하며 놀렸지만, 스님은 괴발개발 쓴 작품만은 꼼꼼하게 읽어주었다. 한참 뒤, 뒤통수를 긁고 있는 초짜에게 방할(棒喝) 같은 한마디를 했다.
“잘 썼어. 그런데 자네는 좋은 말을 너무 많이 하려는 게 탈이야. 좋은 말이 많으면 시가 안 돼. 그러니 좋은 말은 다 버리고 남은 말로 시를 쓰게. 그리고 억지로 쓰려 하지 말게. 그건 망하는 지름길이야. 안 쓰면 견딜 수 없는 소재가 생기면 그걸 쓰게. 설령 잘 못 써도 그런 게 시가 되네. 나는 한 50년 시를 썼는데, 게으르기도 하지만 지금껏 겨우 2백여 편이 조금 모자라게 썼을 뿐이네.”
지금도 시를 읽거나 쓸 때면 스님이 해준 이 말을 떠올린다. 이 기준으로 보면 내 시는 어떤가. 열에 아홉은 버려야 할 것뿐이다. 어쨌거나 그때 스님이 ‘그래도 이건 좀 낫다’며 골라준 시편들을 모아 낸 것이 첫 시집 <내년에 사는 법>이다.
스님을 모시고 했던 일 중 자랑할 만한 것은 계간지 <불교평론>과 시전문지 <유심>을 제작한 일이다. <불교평론>은 젊어서부터 꼭 하고 싶은 잡지였다. 1999년 여름 백담사로 찾아가 잡지를 만들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떼를 썼다. 스님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겨울에 다시 찾아가 제법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잡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3년만 도와주시면 그때부터는 자립하겠다고 뻥까지 치고 봉정암에 올라가 하룻밤을 자고 내려왔다. 스님은 어떻게 준비했는지 시커먼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제작비다. 삼보정재로 마련한 거다. 기왕이면 일류로 만들어라.”
나는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는 병무 사제의 사무실에 책상을 놓고 창간호를 준비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창간호가 나올 무렵 불교방송에서 방송본부장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진퇴유곡, 난감해하는 나에게 스님은 ‘3년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되니 두 가지 일을 다 해보라고 했다. 아마 스님은 처음부터 3년 약속은 믿지 않았던 것 같다.
꼭 필요하다면 절을 팔아서라도 해야 한다는 게 스님의 생각이었다. 이 잡지는 이후 성장을 거듭해 요즘은 제법 명성이 자자하다. 올해 창간 20년을 맞았다. 스님의 절대적 지원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심>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2006년부터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사업에 관여하게 되자 맡겨준 잡지다. 처음에는 ‘만선회’ 기관지 비슷해서 성격이 좀 애매했다. 그것을 시 전문잡지로 만들어보라고 했다.
시단쪽은 청맹과니나 다름없으니 각이 나오지 않았다. 계간을 격월간으로 전환하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쉽게 성과가 나지 않았다. 무언가 계기가 필요했다. 문학잡지는 대부분이 계간지여서 웬만해서는 눈에 띄기 어렵다. 그렇다면 월간을 해보면 어떨까. 망설이던 스님은 “그래, 니 맘대로 해봐라” 하고 허락을 해주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한 3년쯤 했더니 잡지는 제법 때깔이 났다. 여기까지가 <유심>의 정점이었다.
스님은 어느 날 갑자기 잡지를 접자고 했다. 지금이야 버티지만 뒷날 제작비를 감당 못해 폐간하게 되면 문도들이 욕먹는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잡지 제작중단을 전후로 만해마을도 동국대에 기증했다. 그때부터 스님은 벌써 사후의 일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계셨던 듯하다.
잡지 편집자의 가장 큰 애로 중 하나는 발행인의 간섭이다. 재정 후원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권리라는 듯 인사나 편집 방향에 일일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잡지뿐만 아니다. 무슨 단체나 무슨 재단도 마찬가지다.
돈줄을 쥔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현실이다. 오죽하면 ‘돈 나오는 곳에서 권력 나온다’는 말이 생겼겠는가. 그러나 스님은 어떤 사업을 해도 철저하게 자본과 경영을 분리했다. 특히 내가 맡았던 잡지 부문에서 스님은 철저하게 무간섭주의로 일관했다.
<불교평론>의 경우 잡지의 성격상 껄끄러운 원고들의 적지 않게 실렸다. 불교계나 종단의 불평이나 항의가 심심찮았다. 그때마다 스님은 묵묵하게 참고 넘어갔다. 한 번도 편집진에게 난처한 말을 전하지 않았다. <유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스님에게 부탁했을 터이지만 “홍 주간은 내 말 안 듣습니다. 제작 문제는 전적으로 편집실에서 알아서 해요” 하며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늘 두 잡지에 대해 ‘잘한 것은 편집자의 공이고 못한 것은 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했다. <유심>과 <불교평론>이 상당한 수준의 명성과 권위를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스님의 우산 아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스님은 남에게는 너그러웠지만 자신에 대해 매우 엄격했다. 때때로 진정한 수행승의 무리에서 낙오한 엉터리라는 뜻으로 ‘낙승(落僧)’을 자처할 정도였다. 약력에는 ‘열두 살 때 절간 소머슴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써넣기도 했다. 이런 겸사(謙辭)는 철저히 자신은 낮추기 위한 자기암시였다. 실제로 스님은 만해대상 시상식 때면 용대리 이장님을 높게 앉히고 자신은 아래에 앉았다. 장관이나 국회의원은 안 만나도 노인회 어른들은 윗자리에 모셨다. 잘난 사람보다는 평범한 이웃이야말로 받들어야 할 부처라는 것이다.
설악산에는 결제나 해제 때가 되면 전국에서 승적도 없는 유랑승들이 모여든다. 종단에서는 이들이 승려의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객비(客費)를 주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스님은 언제나 이들을 후하게 대했다. 소문이 나 객승들이 무리 지어 몰려올 정도였다. 문도 중 누가 이들을 제지하려 하자 도리어 야단을 쳤다.
“저 사람들이나 너희나 뭐가 다르노? 너희는 저들보다 얼마나 잘났노? 저 사람들은 객비 몇 푼 얻으면 그만이다. 너희는 그 돈 아껴 어디다 쓰노? 양심적으로 말해봐라, 나도 엉터리 중인데 너희는 참중이가? 중생이 곧 부처인데 사람을 차별하면 곧 부처를 차별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안 그렀나?”
문도들은 입이 막히고 혀가 끊어지고 코가 석 자나 빠진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랫동안 스님을 모시면서 등골이 오싹하도록 혼이 난 적이 있다. 불교평론과 유심을 제작하는 편집실에 일손이 필요해 젊은 친구를 편집기자로 데리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 젊은 친구는 집중력이 좀 모자랐다. A에게 보내야 할 원고료를 B에게 보내고 C에게 보내야 할 메일을 D에게 보내는 식의 일이 잦았다.
고심 끝에 그를 내보내고 다른 친구를 데려오기로 했다. 어느 날 편집실에 들른 스님에게 이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스님은 나를 엄하게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씀했다.
“자네같이 잘난 놈들은 아무데 가서나 먹고 살지만, 못난 놈은 잘난 놈들이 거두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냐? 꼭 필요하면 새 사람을 들이고 그 친구는 청소라도 시키면서 데리고 있어라.”
그 말씀에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중에 그 친구는 스스로 그만두었지만, 이 일은 오래도록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만해마을 심우장에 있는 스님의 방에는 등신대의 해골이 선탁(禪卓) 위에 놓여 있다. 두개골을 스캔해서 에폭시로 모형을 뜬 것이다. 서울 신사동 선불선원에는 중국 여행 때 사온 춤추는 해골이 있다. 어떤 사람이 스님을 뵈러 왔다가 이를 보고 기겁을 하면서 꿈에 나타날까 무섭다고 했다. 그 말을 전했더니 스님은 정색하고 일장 법문을 했다.
“해골이야말로 우리의 본래 모습인 기라. 누구든 해골이 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노? 석가도 예수도 진시황도 나폴레옹도 다 백골이 됐다. 사람들은 자기는 천년만년 살고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욕심부리고 화내고 못된 짓 하는 기라. 부처님 가르침이 머 별거 있나. 누구나 죽으면 백골이 된다는 것을 알라는 거다. 이것만 알면 더 깨달을 것이 없다. 내가 저걸 옆에 두고 아침저녁 쳐다보는 건 내 본래 면목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야 헛된 욕망이 넘어가려 하다가도 다시 정신을 차린다···.”
매일 자신의 해골을 바라보며 살아서였을까, 스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하심(下心)과 무욕이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나누어주고, 없으면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어려운 이웃을 보살폈다. 스님이 주관했던 만해축전, 장학사업, 잡지 제작 등은 무욕과 이타의 철학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년에 설악산문의 조실로 추대된 스님은 수행자들에게 자주 ‘깨달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깨달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공덕을 이웃에게 돌리는 회향(廻向)이야말로 불교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도 했다. 스님의 시는 이 같은 철학의 문학적 표현이었다. 스님의 불교는 ‘해골의 불교학’ 스님의 시는 ‘해골의 시학’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선종 어록에 대방무외(大方無外)란 말이 있다 ‘너무 커서 바깥을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스님은 큰 뜻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소소한 절의를 버리기도 하고, 반대로 아무리 사소한 것도 중요하다 여기면 소홀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는 밥 한 그릇도 비싼 것을 먹지 않았지만 남을 위해서는 기꺼이 모든 것을 다 내놓았다.
다른 사람이 별처럼 빛나도록 스스로는 밤하늘이 되어 모두를 품었다. 한국불교는 앞으로도 규격에 맞는 고승은 수없이 배출할 것이다. 그러나 스님처럼 파격과 무애를 보여주는 고승은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스님은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가셨다. 그런 분을 오래도록 곁에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님을 다시 뵐 수가 없다. 섭섭한 마음을 달래려고 초재를 지내고 올라오면서 작은 영정을 자동차 뒷자리에 모시고 왔다. 선불선원에 조촐한 영단(靈壇)을 마련해놓고 1주기 때까지 아침에는 향 한 자루, 저녁에는 담배 한 대를 올렸다.
그때마다 스님은 ‘불교 공부 했다는 놈이 웬 헛짓이냐’며 꾸짖는 것 같다. 하지만 지친(至親)이나 다름없던 스님을 여읜 백랑도천(白浪滔天)의 슬픔을 어찌 쉽게 달랠 수 있겠는가.
스님의 시 ‘절간 이야기’ 어디쯤 “죽는 날이 가장 즐거운 날”이라는 대목이 있다. 기왕 즐거운 날을 맞으셨으니 열반장락(涅槃長樂)을 누리기를 합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