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축전·무산 조오현②] “온몸에 자유의 피가 돌아다니는 스님”

압델라힘 모로코작가연합회장이 오현 스님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다. <사진=김남주>

[아시아엔=성우 조계종 전계대화상] 평생 도반 무산 화상이 떠났다. 우리가 벌써 이렇게 헤어질 때가 되었단 말인가. 돌아보면 아득한 세월이다. 풋중 시절 우리는 얼마나 순진했던가. 그때는 천하가 다 내 품 안에 들어올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동안 품었던 것들이 하나둘 다 빠져나가고 있다. 이제 곧 나도 그렇게 떠나가야 하리라.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도 이렇게 하늘이 푸르렀다. 1964년 여름이었다. 나는 대구 파계사에 살고 무산 화상은 밀양 성천사에 살고 있었다. 우리의 공통점은 젊은 승려였다는 것, 시조를 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외로웠다는 것이다. 서로 위로가 될 친구가 필요했다. 이런 사정을 안 어떤 사람이 다리를 놓았다. 서라벌예대를 졸업한 누구였던 것 같다. 그가 양쪽에 연락해서 만날 곳을 잡았다. 장소는 남천강이 흐르는 밀양 영남루. 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누가 먼저 와서 기다렸던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여튼 우리는 처음 만난 사이였는데도 서로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 문학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인연이 남천강처럼 흘러 오늘까지 이어질지는 더욱 몰랐다.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비록 그가 대처승 절에 살고 나는 비구승 절에 살지만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시간만 허락되면 인편이나 편지로 연락해서 만나곤 했다. 그동안 써온 작품도 보여주고, 속으로 은근히 질투도 하고 그러면서 우정을 키워갔다.

그 무렵 우리를 이끌어주었던 스님 한 분이 있다. 청도 유천에 있는 어떤 암자의 노스님이었다. 법명을 혜초라고 했는데 이목구비가 수려한 데다 학식이 깊었다. 당시는 한국불교 전체가 정화운동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대처를 했던 이 스님도 큰절에는 살지 못하고 작은 암자에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불경에 조예가 깊어 모르는 것이 없었다. 특히 선가(禪家)의 게송에 대해서는 사전이나 다름 없었다.

千尺絲綸直下垂 천 척이나 되는 긴 낚싯줄을 드리우니
一波動萬波水 한 파도가 일어 만파도를 일으키도다
夜靜水寒魚不食 밤은 깊고 물은 차 고기 물지 않으니
滿船空載月明歸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도다

이 게송은 〈금강경 야보송〉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님은 이 게송의 원작자가 뱃사공을 하던 선자덕성이라는 선객이라고 했다. 야보송으로 알려진 것은 야보가 이 게송을 인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박식에 놀라워했지만 무엇보다 선시의 진미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제야 고백이지만 머리가 좋았던 무산은 이때 그 게송의 속뜻을 나보다 먼저 깨쳐 간 듯하다.

뒷날 화상이 쓴 시에는 그때 혜초 스님에게 들었던 게송을 멋지게 재해석한 것이 여러 편 보인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나 할까. 50년 이상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화상은 참으로 담대한 사람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혜초 스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청도 신둔사라는 절의 객실에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그날 밤 신둔사에 강도가 들었다. 한창 자고 있는데 누가 발로 걷어 차 눈을 떴더니 시커먼 복면을 쓴 강도가 들어와 있었다. 강도는 턱밑에 칼을 들이밀고 가진 것을 다 내놓으라고 했다. 혼비백산한 나는 벌벌 떨며 가진 것을 다 내놓았다. 걸망 속까지 열어 보이며 가져갈 것 있으면 다 가져가라 했다.

그러나 화상은 달랐다. 자기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죽일 테면 죽이고, 살릴 테면 살리라고 배짱을 부렸다. 강도는 어이가 없었는지 눈만 한 번 부라리다가 나갔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난 뒤 다시 자리에 누우려는데 화상이 한마디 했다.

“빙신아, 뭐가 그리 무섭노. 그래 봐야 죽기밖에 더하겠나. 뭐할라꼬 강도한테 있는 거 없는 거 다 바치노.” 나는 그때 알았어야 했다. 이 사람은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자기만의 길을 갈 사람이라고. 그러나 아무리 도반이라지만 그런 것까지 알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해인사 율원에 있을 때였다. 그 무렵 화상은 밀양 약수암이란 암자에서 독살림을 하며 수행과 시작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출가한 중이라면 큰 절에서 장판 때를 묻혀가며 대중살이를 해야 한다. 평생 중노릇을 하려면 이런 바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화상에게 해인사로 오라고 편지를 썼다. 만약 화상이 해인사에 온다면 좋은 점이 많았다.

먼저 대처승 상좌라는 딱지를 뗄 수 있고, 좋은 도반을 사귈 수 있고, 무엇보다 강원에 들어가 글공부도 할 수 있었다. 화상은 내 간곡한 권유에 못 이겼는지, 아니면 해인사 구경이나 해보자는 심산이었는지 하여튼 해인사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우선 화상에게 사미계를 다시 받게 했다. 그때는 합동수계가 아니라 단독수계도 가능할 때였다. 그래서 당시 해인사에 주석하던 고암 종정을 계사로 수계를 받게 했다. 그때 나는 율원에 있었으므로 의식을 돕는 인례(引禮)를 했다. 이제 강원에 입방(入房)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생겼다.

알다시피 화상은 평생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때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것도 남몰래 피우는 것이 아니라 여봐란듯이 피웠다. 해인사에 왔을 때도 그랬다. 객실에서 담배를 피우자 그 향내가 경내를 진동시켰다. 지나가던 자운 스님이 이걸 보고 진노했다. 화상은 그 다음 날 짐을 싸서 해인사를 떠났다.

사실 계율에 담배 피우지 말라는 계목은 없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승려가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런데 화상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깨버리는 파격이 화상의 면모였다. 그제야 알았다. 화상은 온몸에 자유의 피가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후 우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화상은 선승의 길로 나갔고 나는 율사의 길로 갔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존중했다. 1972년 여름 우리는 파계사에서 이른바 승려시인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첫 모임에는 화상과 나, 그리고 병석, 정휴, 향봉, 다운 스님 등이 참여했다, 이 모임은 나중에 불교문학의 저변을 확장해가는 구심점이 되었다. 오늘날 불교문학이 어느 정도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순전히 좋은 작품을 쓴 화상의 공덕일 것이다.

그런 그가 떠났다.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어 졸작 한 편을 지어 50년 도반과 석별의 마음을 표한다.

무산 스님
쏜살같이 이십팔대지옥 가소서
그곳 중생들
스님 학수고대할 것이오
한 사흘쯤 머물며
그들에게 마정수기 주시고

무산 스님
가사 자락 낡기 전에
도리천으로 가소서
그곳 도반들과 함께
무생곡(無生曲)을 목청껏 부르소서
여기서도 사흘쯤 머무시고

무산 스님
설악산이 외로워하니
사바에 오소서
아, 참 노벨상 받으러 오셔야지요
지난 세상 지은 인연
어이 하오리까
그리고는 허허 웃으며
또 수미산을 쌓으소서.
?졸시 ‘무산 스님 영전에’

출처: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

 

성우 조계종 전계대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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