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의 범죄사회학] 이런 군대였으니 망할 수밖에
군대는 하나의 기업이었다
[아시아엔=김중겸 전 경찰청 수사국장]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힘 센 부족이나 왕이 약자를 죽이는 약육강식시대가 됐다. 무력이 있는 쪽에 붙어야 생존했다. 신하나 속국 되어 주군 섬겼다. 대신 안전을 보장받았다.
이때의 무력은 군사력이다. 상비군이 없던 시대, 돈 주고 고용하는 용병이 판 쳤다. 연대(regiment)가 군 편성의 기본이었다. 연대는 주식회사였다.
연대장이 발기인이자 사장이며 장교는 출자자, 병사는 상품이었다. 왕이나 정부가 전쟁한다면서 주문하면 병사들을 모아서 출정한다.
주식 사듯 장교 자리 샀다
아무리 귀족이고 지주라 하더라도 상속으로 재산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평민으로 추락할 위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한 땅 감소방지 대책을 마련했다.
장남에게만 땅을 주었다. 땅을 보존해 지주신분 유지했다. 차남 이하는 각자 알아서 세상 살아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었다. 성년 되면 나가라 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에서는 차남 이하는 군 장교로 만들었다. 1661년부터 1871년 사이 군개혁으로 폐지되기까지 Army Purchase System을 이용, 명문가의 66%가 장교 자리를 구입했다. 차남 이하 아들에게 줬다.
18세기 초 소위(少尉) 값은 몇 십만 파운드, 소령 값은 몇 백만 파운드였다. 18세기 말에는 각각 4백만 파운드, 1천6백만 파운드로 급등했다.
아들이 미성년자면 대리자(warming pan)을 샀다. 성년 될 때까지 대신 근무시켰다.
병사들은 가족을 데리고 다녔다
대원에게는 수당이 지급됐다. 약소했다. 노획품은 보너스, 이게 더 컸다. 계급에 따라 분배했다. 그러니 약탈이 성행할 수밖에.
마오쩌둥이 민심 얻은 이유의 하나는 약탈금지다. 쌀 한 톨이라도 엄벌에 처했다.
또 하나는 아무데나 대소변 보지 말라는 규칙이었다. 생각해 보라. 대대, 연대, 사단이 지나가며 마구 싸대면?
고용된 병사들은 모험가였다. 땅뙈기라도 있다면 전쟁터로 가겠는가. 먹고 살 길 없어서 나선 길, 가족 굶어죽게 놔두고 가는가. 같이 길 떠났다.
군대행렬 구성은 복잡하고 길었다. 선두는 그야말로 싸울 군인들, 두 번째는 업자들의 군인용 식당과 군 장비 판매가게. 세 번째는 가족. 그러면 네 번째는 무엇?
주코프 장군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는 소련의 영웅이다. 나치와의 전쟁을 주도했다. 원수가 되고 국방장관도 역임.
베를린으로 진격하면서 궁전, 박물관, 미술관, 은행, 보석상 털었다. 약탈품을 군용 열차와 비행기로 자택으로 날랐다.
소문이 고약하게 퍼지며 전쟁 후 그의 집 수색했다. 장롱 50개, 금시계 17개, 가구, 은 식기, 모피, 골동품, 고서, 그림 등 총 323개 품목을 압수했다.
독일 침공군 총사령관이 이 정도였으니 밑의 부하들은 어떻게 했겠는가.
물건 약탈은 기본, 사람유린이 더 심각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면서 한 행위는 강간하고, 그걸 은폐하려고 찢어 죽이고, 총살하고···.
소련군은 그 몇 배로 갚았다. “너희들이 우리 어머니, 내 딸, 나의 누나와 여동생 어떻게 했느냐?” 능욕하고, 윤간하고, 죽이기로 마무리했다.
주코프 장군의 친구
그와 절친한 블라디미르 크류코프 중장이 1945년 독일 침공 때 가는 곳마다 빼놓지 않고 강탈한 게 있다. 다이아몬드다. 금은보석은 다 제쳐두고, 다이아몬드란 다이아몬드는 다 손에 넣었다. 부인에게 보낼 선물이었다.
그뿐이랴. 야전병원(field hospital)의 병동 한 곳을 사설 매음굴(private brothel)로 운영했다.
군대행렬의 네 번째가 바로 그 시설이다. 오랜 전통이었다. 크류코프 중장이 이를 몸소 실천했다. 고객은 장군의 부하들이었다.
1948년 다이아몬드에 대하여 부하가 고발해 부인과 함께 체포됐다. 1951년 25년 형을 받았다. 1953년 스탈린 사망으로 극적으로 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