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탁의 독서칼럼] 세르주 라투슈 ‘낭비 사회를 넘어서’와 법정 스님의 만남

강요된 네오필리아(neophilia), 계획적 진부화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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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석혜탁 <아시아엔> 트렌드 전문기자] 독일의 철학자 귄터 안더스는 현대의 소비자들이 ‘네오필리아(neophilia)’에 사로잡혀 있다고 갈파한다. 네오필리아는 새로운 것(neo)을 좋아하는(philia) 경향을 의미한다.

세르주 라투슈의 <낭비 사회를 넘어서>를 읽다보면, 이 네오필리아가 현대인의 자연스러운 소비습성이라기보다는 어떤 외부적 경제 메커니즘(이윤)과 이해관계에 의해 강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강요의 실체가 이 책의 부제(‘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계획적 진부화’란 말 그대로 계획적으로 상품의 가치를 진부화시키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제품에 결함을 삽입하고, 그 수명을 단축하고 제한하는 작태를 일컫는다.

가령, 프린터를 제조할 때 특정 매수 이상으로 인쇄를 하면 자동으로 작동을 멈추게 하는 마이크로 칩을 삽입하는 방식이다. 더욱 튼튼하고 성능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기업이 외려 제품 내구성에 해를 가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니, 저자의 말마따나 ‘광기’에 다름 아니다.

불유쾌하게도 이 광기의 역사는 생각보다 유구하다. 1881년 에디슨이 만든 전구는 수명이 1500시간이었고, 40여년 후 생산된 전구는 평균수명이 2500시간에 달했다. 그런데, 수명이 짧아야 소비자들이 자주 구매를 하기 때문에, 전구 제조업체 관계자들에게 이런 긴 제품 수명은 발전이 아닌 퇴행이었고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전구의 수명을 1000시간 이하로 제한하자는 결론에 이르고, 이른바 ‘1000시간 위원회’의 감시 활동 덕분에 전구의 제품 수명은 그들이 원하는 시간대로 퇴보시킬 수 있었다.

자동차 한 대를 끌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나일론 스타킹을 개발한 엔지니어들에게 돌아온 건 칭찬이나 인센티브가 아니라 스타킹에 ‘죽음의 유전자’를 삽입하라는 경영진의 주문이었다. 스타킹을 덜 질기게 만들라는 것. 이 사례는 산업논리의 포악함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 옛날 1940년대에도 듀폰사가 올이 풀리지 않는 스타킹을 만들 수 있었는데, 70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여성들은 스타킹을 자주 사야 한다. 계획적 진부화는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더욱 좋은 제품을 ‘못’ 만드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는 게 씁쓸한 뿐이다.

<낭비 사회를 넘어서>의 저자 세르주 라투슈는 “소비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되었다”고 말한다. 대량생산은 대량소비를 전제로 한다. 그래야 물건이 모두 처분되기 때문이다. 네오필리아가 왜 강제된 것(‘거부할 수 없는 명령’)인지에 대한 단서가 나오는 대목이다.

이 화려한 소비사회에서 수요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갖고 있는 물건들이 주기적으로 사라져야 한다. 기업은 광고, 소비 금융, 계획적 진부화를 동원하여 새로운 상품을 구매하도록 강제한다. ‘불만을 파는 상인(광고)’, ‘복리의 테러(신용)’의 무차별적인 공세 앞에 소비자들은 힘없이 무너진다.

계획적 진부화는 이 중에서도 파괴력이 가장 강하다. 광고와 대출이 거절 가능한 것임에 반해 제품의 기술적 결함 앞에서는 대부분의 소비자가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계획적 진부화는 ‘성장 사회를 이끌어 가는 소비주의의 절대적 무기’인 것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고쳐 쓰면 되지”라고 말하시며 한번 산 물건을 절대 쉽게 버리지 않았다. 이렇듯 네오필리아는 이윤논리에 의해 작위적으로 우리의 의식에 기입된 코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의 어법을 빌리자면, “일회용 제품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우리의 의식이 식민화된 결과”이기도 하다.

쇠퇴의 대량생산. 형용모순처럼 들릴 수 있지만, 현대 소비사회를 나타내는 데 가장 적확하며 동시에 뼈아픈 표현이다. 문제는 상품을 넘어 인간까지도 포함하는 ‘일반화된 퇴락’이 양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일회용 제품처럼 인간도 소외되거나 사용 후 간편하게 해고되는 것이다. 진부화의 논리가 인간마저 진부화시킬 수 있다는 것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탈성장 이론가로 유명한 경제학자답게 저자 세르주 라투슈는 계획적 진부화로 표상되는 낭비 사회에 대한 대응책으로 ‘탈성장 혁명’을 제안한다. 물론 이는 촛불을 사용하는 시대로 회귀하자거나 금욕주의적 고행을 실천하자는 말이 결코 아니다.

‘계획적 진부화’가 아닌 ‘계획적 재활용’을 지향하고, 전환 마을과 에코 디자인에 관심을 두며, 세탁기와 같은 내구재의 공동사용과 비재생 자연 자원의 관리 등에 대하여 숙의를 해보자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무소유’가 현실적인 대처가 되기는 어렵지만, 법정 스님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조작된 네오필리아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거부하고 계획적 진부화의 민낯을 똑똑히 바라보는 태도. 이것이 ‘낭비 사회를 넘어서’ 주체적인 소비자로 살아가는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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