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가볼만한 곳①] 발명왕 에디슨의 재발견 ‘손영목 참소리박물관’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지난 12일 ‘58개띠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생 70여명과 함께 강릉지역의 오죽헌, 경포대, 참소리박물관 등 명소를 방문했다.
강릉시 경포로 393 소재 참소리축음기·에디슨·영화박물관(Charmsori Gramophone·Edison·Film Museum)을 방문하여 수많은 전시물을 관람하면서 발명왕 에디슨이 초년병 의사에게 보낸 격려의 메시지와 자필서명 편지를 담은 액자(frame)를 발견하고 보건학도로서 매우 반가웠다.
편지내용은 다음과 같다. “The doctor of the future will give no medicine but will interest his patients in the care of the human frame, in diet, and in the cause and prevention of disease. Thomas A Edison”
편지에 따르면 에디슨은 단순히 약을 처방하는 의사가 아닌 인간애로서 환자를 돌보고 식이(食餌)와 질병예방에 관심을 기우리라고 권고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 헌장(憲章, Constitution)은 ‘건강’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다.
“Health is a state of complete physical, ment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이 없고 허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를 말한다.)
토마스 엘바 에디슨(Thomas A. Edison)은 1847년 미국 오하이오주(州) 밀란에서 태어났다. 병약(病弱)했지만 호기심 많고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병약한 몸 때문에 남들보다 늦게 학교에 입학했다. 암기 위주의 학교 교육은 맞지 않아 입학한 세달 만에 퇴학당하고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결혼 전에 학교 교사 경험이 있는 에디슨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많은 책을 읽게 하였다. 에디슨은 기꺼이 책을 읽었고, 열네 살 때에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작품을 모두 독파할 만큼 수준 높은 독서를 했다.
에디슨이 가장 좋아한 책은 리처드 그린 파커가 쓴 <자연과학과 실험과학 입문>이었다. 이 책은 1850년대 물리학 등 과학 분야를 소개한 것으로 간단한 실험들이 소개되어 있어 호기심 많은 에디슨에게는 꼭 맞았다.
우리는 흔히 에디슨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말하는 기계’ 축음기(蓄音機), 인류를 빛의 왕국으로 이끈 전구(電球), 그리고 20세기 영화산업의 시작을 알렸던 영사기(映寫機)를 꼽는다. 하지만 위대한 세 가지 발명품에 비해 크게 알려져 있진 않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전기 생활용품은 100여년 전 에디슨으로부터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디슨이 ‘발명의왕’이란 칭호를 얻게 된 것은 창조적 재능뿐 아니라 숱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낙천성(樂天性)과 자신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자신감(自信感)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에디슨이 남긴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노력”,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그의 발명 인생을 지탱해준 거대한 뿌리였다.
에디슨이 남긴 명언(名言)에는 “나의 발명은 한 가지 일에 무수한 경험을 쌍아 올린 것이다.” “성공이란 그 결과로 측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소비한 노력의 총계로 따져야 할 것이다.” “천재란 노력을 계속할 수 있는 재능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생각과 작업을 투입한다면, 때로는 실패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등이 있다.
참소리축음기·에디슨·영화박물관은 설립자 손성목 관장이 50여년 간 세계 60여개국을 방문하여 수집한 발명왕 에디슨의 발명품 등 5천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특화박물관으로 세계 최대규모라 할 수 있다.
박물관에서 ‘소리’ ‘빛’ ‘영상’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손성목 관장이 여섯 살 때 부친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포터블축음기(콜롬비아 G241)은 6.25전쟁 중 1.4후퇴 때 함남 원산에서 강원도 속초까지 피난길에도 간직하고 와서 현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