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홍길 DMZ평화통일대장정 대학생수기④유송이] 스무살 여대생에게 넘을 수 없는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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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여름. 15박 16일 동안 뜨거웠던 스무 살의 대장정 이야기

[아시아엔=유송이 안양대 식품영양학과 1년] 고등학생 때 TV를 통해 국토대장정 다큐를 보았다. 무거운 배낭, 맞잡은 손, 빗속 행군, 완주식장에서의 눈물이 담긴 영상을 보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된 지금 평범한 대학생활을 보내던 중 ‘도전하지 않는 젊음은 낭비일 뿐이다’라는 멘트와 함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휴전선 155마일을 걸을 수 있는 평화통일대장정 포스터를 보았다.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지원서를 제출하고 학교에서 한창 체육대회가 진행되던 5월 중순 1차 서류합격 문자를 받았다. 단지 1차 합격문자였지만 그 문자는 내게 최종합격이라도 한 듯한 설렘을 주었다. 하지만 아직 2차 면접과 체력테스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많은 과제로 따로 운동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등하굣길에서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버스 대신 걸어 다니며 틈틈이 체력테스트를 위해 운동했다.

면접날 아침 5시에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신한대학교를 향했다. 드넓은 운동장에는 나처럼 면접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움직인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본인확인을 하고 하루 일정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곧장 도봉산을 향해 걸어갔다. 출발하기 전부터 계속 들리던 이야기가 등산을 할 때 빨리 나아간다고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팀워크, 단체 속에서의 행동을 평가한다고 했다. 나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휘에 다라 산을 등산했다. 무더위 속 등산을 끝내고 점심식사를 한 후 정해진 순서에 따라 면접이 진행되었는데 면접 전 엄홍길 대장님께서 신한대학교를 방문해주셨다.

마음속으로 2차까지 합격이 되어 엄대장님이 이끄는 대장정의 대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 간절했다. 오랜 대기시간 끝에 면접을 보고 다시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여름을 맞이하고 있을 무렵 “DMZ평화통일대장정 대원으로 최종 선발됨을 통보드립니다”란 내용의 문자를 받았다. 나의 간절한 바람이 이뤄지는 동시에 나는 이미 행군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약 한달이란 시간이 남은 동안 인터넷으로 평화통일대장정의 환경이나 전 기수 완주자분이 남긴 글을 읽고 궁금증을 물어보며 하나 둘 가방을 채워나갔다. O.T 전날은 잠자리를 한참이나 뒤척였다. 20년동안 살면서 2주라는 기간 동안 집을 비운 적이 없을뿐더러 하루에 약 30km되는 거리를 걷는 것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생각과 함께 잠을 자고 드디어 O.T 당일 날이 되었다. 2주간의 나의 짐, 걱정, 설렘을 가득 채운 가방을 들고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를 하며 면접을 보았던 신한대학교를 갔다. 가장 처음 노란색으로 적힌 ‘통일팀 유송이’ 이름표, 나의 일기장과 앞으로 걸어갈 코스를 알려줄 가이드북을 받고 강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통일팀 팀원들과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행군 물품들을 지급받고 가방을 싸며 행진실장이신 유병호 실장님의 말씀과 함께 본격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다. 평소 자유롭게 살아오던 나에게 UDT요원들의 지휘와 엄격한 규율의 단체생활은 중고등학생 때 2박3일 극기 훈련 이후로 처음이었다. 흔히 “다, 나, 까” 말투라고 불리는 것을 계속 듣자 나도 그 말투에 적응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가족들과의 통화 후 핸드폰은 잊고 살아야 하기에 잠시만 안녕.. 오리엔테이션 시간동안 나의 집중력이 최고로 도달한건 텐트 교육시간이었다. 텐트를 처음 쳐보는 것도 이유였지만 행군을 끝내고 나의 몸이 편히 쉴 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때는 내가 텐트 치는 것이 익숙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후 밖으로 나가 실제로 텐트를 쳐보고 다음날 있을 발대식 연습 후 팀원들과 공식적으로 자기소개 하는 시간을 가졌다.

예상대로 나는 통일팀 막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동갑도 없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내겐 언니, 오빠들이었다. 이름으로 불리기 전 ‘막내’로 불리며 첫날 밤을 보냈다. 발대식 날, 행군 정복을 차려입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1시간 내외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가만히 서있어야 한다는 것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앞으로 2주간 보지 못할 도시에서의 모습을 눈에 가득 담고 있을 무렵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와 친오빠가 나를 보기 위해 온 것이었다. 하루 안 봤을 뿐이었지만 정말 반가웠다. 집에서도 막내, 대장정 동안도 막내였기에 가족들도 걱정이 되었나보다. 정말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출발점인 강원도 고성으로 향했다. 통일전망대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후 행군이 시작되었다. 요원 분들이 “악!, 꽥!, 킹~콩~, 우~가~” 구호 4개를 가르쳐주었다.

이 구호는 앞으로 내가 매일매일 외쳐야 할 구호였다. 첫 날은 몸 풀기 날이어서 얼마 걷지 않아 숙영지에 도착했다. 숙영지에 도착하면 신나는 노래와 함께 스태프 및 우리를 환영해주는 분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다. 지치다가도 힘이 빠짝난다. 이 맛에 행군하나 보다. 그리고 다함께 구호를 외치며 서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며 행군을 끝낸다.

내가 생각하는 대장정 1부가 시작했다. 오전 6시 기상송을 들으며 비몽사몽한 상태로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오늘은 본격적인 행군이 시작되는 날이다. 나는 아스팔트의 열기가 그렇게 뜨거우리라고는 직접 걸어 보고나서 알았다. 오와 열은 맞춰야 하고 배낭은 무겁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행군에 적응하기가 다소 힘들었다. 첫 중식지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앞으로 남은 거리를 다 걸어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면서도 전날 다 알지 못한 팀원들의 나이와 이름을 알아가며 힘든 생각도 싹 사라졌다. 그리고 다함께 팀 구호를 정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최신가요에 가사를 바꿔서 정할까? 짧고 굵게 할까? 여러 의견을 종합해 우리는 무조건 노래와 트와이스의 cheer up 노래의 가사를 바꿔 팀 구호를 정했다. 함께 노래를 부르니 걸을 힘도 생기고 이런 것이 팀이란 느낌을 받았다.

대장정 기간 동안 나에게 총 3번의 고비가 찾아왔는데 첫 번째 고비는 생각보다 빨리 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바로 진부령이었다. 진부령을 올라가는 동안 초반 30분은 팀원들과 잘 걸어갔다. 이후 숨이 빨라지는 것과 반대로 걸음은 느려졌다. 조장 언니 오빠의 도움으로 손을 잡고 올라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엄대장님께서 직접 수건으로 나를 이끌어주고 계셨다. 뒤에서는 조원들이 가방을 받쳐주며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 순간 눈물이 흘렀다. 팀원들도 힘들 텐데 나를 도와주는 감사함과 미안함,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여러 감정이 합쳐져 얼굴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정도였다. 이 날 일기장에 보면 총체적 난국 이라고 적혀있는데 정말 당시 상황에 딱 들어맞았다. 이 상태로 한 30분쯤 더 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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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해발 500m입니다”라는 표지와 함께 진부령 정상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국이었던 오이냉국이 그렇게 시원하고 힘이 된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아직도 그 때의 순간을 생각하면 어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나에겐 큰 장벽이었다. 하지만 팀원들과 함께하는 대원들이 있기에 포기하지 않고 올라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나는 15박 16일 동안 하루라도 손을 안 잡은 날이 없을 만큼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서로 맞잡은 손은 생각보다 훨씬 나에게 힘을 주었고 용기를 주었고, 매일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분들이 내밀어준 손은 나 스스로를 이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동시에 구호처럼 우리는 하나였다. 대장정을 시작한지 3일 만에 샤워를 했다. 비누와 함께한 샤워가 나에게 행복을 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여기서는 엄청난 행복이다. 머리카락이 뻣뻣해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랴, 씻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샤워는 10분 또는 15분 이내로 해야 했기에 대중목욕탕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초반에는 우왕좌왕 하느라 빨래는커녕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이렇기를 두 세 번 하자 빨래를 할 여유도 생기고 상쾌한 느낌으로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 물론 마지막 날까지 시간은 빠듯했지만 말이다. 이 날부터 나의 발은 행군의 상징이라 불리는 물집이 생겼다. 살면서 발에 물집이 처음 잡혔기에 내가 행군을 잘 하고 있나보다 생각하며 뿌듯해 했지만 이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장 의료팀에 가서 물집을 빼고 걸으려 하자 어라? 물집 잡힌 발가락이 아파오는 것이다.

사이좋게 양발 새끼발가락에 생긴 물집들이 골치 덩어리가 되었다. 이튿날 그 물집자리에 또 물집이 생겨 결국에는 물집을 잘랐다. 의료선생님들이 말씀하시길 다음 주가 되면 괜찮아진다고 했다. 다음 주가 오기는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군이 계속 될수록 의료텐트는 아마 단연 1등으로 인기가 가장 많았을 것이다. 나중에는 팀별로 순서를 정해 새벽까지도 치료를 받았고 노하우가 생기자 자가 치료까지 가능해졌다. 나도 이제 물집정도는 해결이 가능했다. 치료받을 때는 스무 살이 아니라 두 살처럼 온갖 엄살이 다 나왔다. 늦은 시간까지 치료해주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웃음을 잃지 않고 대해주는 의료 선생님들은 착한 분들이었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이름 하나하나 다 기억해주셨다. 다음 인기 2등이 아마 화장실? 바로 ‘똥차’다. 휴식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거리의 백의자릿수가 2로 바뀌었다. 벌써 50km이상을 걸었다는 뜻이다. 아직 걸은 날보다 걸을 날이 더 많지만 그저 감사했다. 어서 빨리 언니들한테 알려주려고 텐트로 향했다. 텐트에서 자는 것이 점점 익숙해져간다. 행군 넷째 날 아침, 4~6시 첫 불침번을 서게 되었다. 오리엔테이션 첫날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할 숟가락을 무의식적으로 식판과 함께 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불침번을 섰는데 배낭만큼이나 아니, 그 때는 솔직히 배낭보다 무겁게 느껴졌던 눈꺼풀을 이겨나갔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는데 행군 기간 동안 첫 비였다. 뜨거운 햇빛만 받다가 시원한 비를 맞고 걸으니 덥지는 않았는데 비가 옷에 스며들면서 습해졌다. 이런들 어떠하리. 햇빛을 잠시라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그저 좋았다. 나는 대장정중 가장 기억 남는 코스를 말해보라면 고민 없이 제 4땅굴을 말할 것이다. 제 4땅굴은 과거 북한군이 우리나라의 피습을 위해 파놓은 땅굴 중 하나이다. 우리는 땅굴을 들어가 시원한 공기와 함께 100m가량의 기차를 타고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을 보며 다시 한 번 우리나라를 지켜준 군인들에게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가락 하나하나가 아파온다.

오른발 네 번째 발가락이 너무 아파 취침 전 의료팀에서 치료를 받고 잠들었는데 새벽에 너무 아파서 잠이 깼다. 눈물 날 만큼 발가락이 저려왔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고비였다. 다시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30분간 뒤척였다. 발가락에 힘도 없고 당장 아침에 일어나 걸어야하는데 손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고 있는 다른 팀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기에 소리 없는 비명을 마음속으로 지르며 다시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진통제 두 알을 먹고 한발씩 걸어 나갔다. 대장정 중간지점인 평화의 댐에 다가올수록 퇴소하는 대원이 발생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 또한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수없이 들지만 부모님에게 완주하겠다고 약속한 것과 힘들 때마다 도와준 팀원들을 보며 다시금 각오를 다진다. 나는 완주할 수 있다…나는 갈 수 있다.

드디어 평화의 종이 울리는 순간. 우리는 평화의 댐에 도착했다. 그동안 함께 걸어왔던 팀원들에게, 잘 버틴 나에게 감사함과 뿌듯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평화의 댐은 나에게 힐링의 장소였다. 자다 일어나서 의료치료를 받는 순간도 팀원들과 함께 하기에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그동안 발의 상태가 많이 악화되었지만 그럴 때마다 본인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걸어가는 대원을 떠올리라는 엄대장님과 유병호 실장님의 말을 되새기며 아픔을 이겨나갔다. 평화통일콘서트 날은 팀원들과 장기자랑을 준비하고 가족들과 3개월 후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대장정 팀이 오는걸 알았는지 태양신은 잠시 숨어있고 하루 종일 세찬 비가 내려왔다. 덕분에 시원하게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개인 짐 분출 시간에 일주일 동안 걸으며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짐들은 싹 다 개인 짐 가방에 넣었다. 기분 탓일까? 배낭이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졌다.

남은 일주일도 걸을 수 있다는 무한 자신감이 샘솟았다. 벌써 반이 지나가고 있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문뜩 나는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들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대장정을 즐기고 있는 모습임과 동시에 나 스스로도 강인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마치 논밭을 지나갈 때 보이는 벼들이 햇빛을 받고 자라는 것처럼 말이다. 저녁 후 대원들 모두 강당에 모여 그동안 사진작가님이 찍어주신 사진영상 시청 후 영상편지와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받았다. 교육을 받고 걸을 때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많았지만 사진들을 보자 모두 청춘의 아름다운 장면들뿐이었다. 빨랫감을 주렁주렁 매달린 가방들이 예뻐 보였다. 뜨거운 햇빛아래 빠짝 마른 빨래들을 보면 정말이지 행복하다. 남들은 쉰내가 난다고 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향기 였다. 어느덧 내 이름이 불리고 엄마가 보내준 편지를 받았다. 첫 줄을 읽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행군 중 가장 많이 생각나고 그리웠던 우리엄마. 편지는 마치 엄마가 어디선가 나를 보고 쓰는 말들처럼 들렸다. 아스팔트 위의 뜨거운 열기부터 내가 도중에 포기하고 집에 오지는 않을지, 언니 오빠들과 함께 잘 적응하고 있을지 엄마의 걱정과 나의 도전을 응원하는 편지였다. 엄마의 편지에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송이야, 엄마는 송이를 응원해’라고 적혀있었다. 정말로 나는 해보고 싶고 도전하고 싶은 것이 많다. 나를 믿어주는 가족이 있고 동료들이 있기에 어려움을 이겨내고 평화의 댐까지 왔다. 앞으로 부모님을 만나기까지 남은 일주일도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열심히 걸어 나갈 것이다. 밤에는 우리 텐트에 언니들과 모여 건빵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로의 비밀얘기와 하지 못한 얘기 등등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때론 언니같이 챙겨주면서도 때로는 친구처럼 대해주는 언니들이 있었기에 나는 행복했고 또 행복했다. 평화의 댐에서 휴식을 취한 하루는 나의 몸에도 큰 변화를 찾아왔다. 발이 아물고 고통들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이름처럼 나의 몸과 마음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와주었구나…

대장정 2부 시작. 평화통일콘서트 다음날은 가장 긴 코스인 35km를 걷는 날이다. 걸어야 할 거리가 많기에 새벽 5시에 기상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이유때문인지 시계의 바늘은 참 느리게도 움직이던 날이었다. 평화의 댐 뒤에 민통선을 걸을 때는 우리 대장정 팀뿐이었다. 민통선에는 야생동물이 지나가는 도로를 보며 걷는데 비로 인해 안경에 계속 김이 찼다. 많은 풍경을 눈에 담고 싶었지만 아쉬웠다. 그리고 이 날은 영원히 잊지 못할 군부대 중 하나인 7사단 칠성부대가 숙영지였는데 사단장님께서 마지막구간을 같이 걷고 개개인별로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절절포 수건과 행운의 1달러까지 선물해주셨다. 격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인간으로서 본받고 싶은 분이었다. 그리고 잊지 못할 다른 부대는 이목정 대대이다.

이목정 대대에서 고개를 들고 바라본 수많은 별들. 야간교육을 끝나고 텐트로 걸어갈 때 보았던 별들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느 별보다도 반짝 빛나고 있었다. 침낭에 누워 별을 덮고 자는 기분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휴전선을 횡단하는 취지에 맞게 숙영지의 80% 이상이 군부대였는데 평소 살면서 군부대를 별로 가볼 일이 없는 나와 같은 여자들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또한 많은 군부대에서 우리에게 간식을 챙겨주시고 샤워 공간을 제공해주는 배려를 받았다. 나도 그들처럼 타인을 위해 배려하는 삶을 배웠다. 그리고 내가 팀원들에게 받은 수많은 배려들도 함께 말이다. 행군을 다 끝내고 숙영지에 도착하면 오늘 하루도 잘 걸었다는 생각과 함께 완주식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날만 남았다는 사실에 기쁨과 이유모를 서운함이 밀려온다. 좀 더 웃으면서 걸을 걸,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볼 걸···. 남은 날은 아무 탈 없이 걸을 수 있을 것만 같다고 느껴졌던 그 때, 세번 째 고비가 찾아왔다. 완주를 5일 앞두고 행군하던 중 일사병에 걸렸다. 분명 나는 숨을 쉬고 있는데 가슴이 탁 막힌 기분이 들며 호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서웠다. 정말 무서웠다. 재빨리 배낭을 풀고 코와 입을 비닐봉지로 막고 숨을 쉬자 그제서야 정상적으로 호흡할 수 있었다.

팀원 오빠가 옆에서 도와주며 나를 진정시켜 주었는데 정말 고마웠고 감사했다. 이후 남은 코스는 무더위와 함께였지만 혼자 하는 것이 아닌 함께 걸어 나아가는 대원들이 있기에 힘들어도 웃을 수 있었다. 시간이 어느덧 훌쩍 지나 완주식 전날까지 왔다. 하루 밤만 자고나면 완주라니. 어색하던 팀원들은 모두 친언니, 오빠 같은 사이가 되었고 눈만 뜨면 함께 하던 대장정 대원, 요원분들과 마지막 밤이라니 서운함을 숨길 수 없었다. 물론 물집은 끝까지 나와 함께 했다. 서로에게 롤링페이퍼를 쓰는데 팀원들은 생각보다 나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팀에게 민폐 끼친 일들만 생각이 나서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막내라고 놀리기도 하면서 은근슬쩍 힘이 되어주는 우리 통일팀 가족들에게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언니들과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며 잠에 들었다.

드디어 완주식날. 도로위의 ‘임진각’ 글자는 우리에게 많은 뜻으로 설명된다. 완주식장, 대장정의 마지막, 끝, 해냈다는 성취감 등등으로 말이다. 마지막 점심을 먹고 임진각까지 걸어가는 4km은 노래를 시켜도 좋았고 뜨거운 햇빛도 좋았다. 저 멀리 임진각이 보인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2열로 맞춰 걸어갔다. 숙영지에 들어가는 것처럼 군악대가 우리를 환영해주었고 그 옆에 나를 찾고 있는 엄마를 보았다. 엄마의 눈에도 그리고 나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대장정 기간 동안 나는 참 많이 운 것 같다. 하지만 이때의 눈물은 가장 뜨거웠고 기쁨의 눈물이었다. 짜릿함과 성취감.. 나 말고도 눈물을 흘리는 대원들이 몇몇 보였다. 모두 같은 의미의 눈물이겠지? 의자에 앉아 축하인사를 들을 때 뒤편에 앉은 아빠를 발견했다.

일 때문에 당연히 참석 못 할 거라 생각했던 아빠였다. 아빠랑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아빠가 잘했다며 멋있다고 말해주었다. 더욱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싶다. 막간을 활용해 부모님과 기념사진을 찍고 완주증을 받았다. 2주 만에 핸드폰을 받으니 너무 어색했다. 타자를 치는 것도 손에 핸드폰이 들려있다는 것도 어색했다. 아. 진짜 끝이구나. 마지막으로 태극기, 재단기, 후원사기, 팀 깃발을 반납하고 모자를 던지는 순간 대장정은 마무리 되었다.

15박16일간의 그 누구보다 뜨거웠던 115명 대학생들의 도전은 이렇게 끝이 났고 모두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 글을 쓰며 당시의 상황에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똑똑하지 않은 나지만 대장정의 매 순간은 또렷이 다 기억한다. ‘도전’이라는 단어 아래 시작한 내 첫발은 한발 한발이 모여 열 발걸음이 되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흘린 땀방울과 눈물만큼이나 나를 성장하게 했고 자신감을 주었다. 이제는 마음속으로 기억할 것이다. 대장정 포스터를 보는 순간으로 돌아가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책상 위의 대장정 때 사용했던 이름표, 부채를 보면 추억에 젖어든다. 대장정은 끝났지만 가슴속의 그 순간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 팀원뿐만 아니라 다른 팀의 언니 오빠들과도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한여름 밤의 꿈같았던 시간들.. 이젠 진짜 안녕

그리고 나는 지금 대장정 앓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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