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홍길 DMZ평화통일대장정 대학생수기②김학준] 잭 케루악 ‘길 위에서’ 소설 속 나를 찾아서
[아시아엔=김학준 부산외대 파이데이아창의인재학과 3년] “그렇게 나는 반쯤 끝낸 커다란 원고 뭉치를 책상 위에 놓아두고, 어느 날 아침 마지막으로 포근한 이불을 개 놓았다. 그리고는 기본적인 물품 몇 개만 캔버스 가방 안에 챙겨 넣은 뒤 주머니에 50달러를 넣은 채 태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이 문장은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의 주인공이 여정을 떠나는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담담하면서도 호기롭게 여정을 떠나는 그 모습이 멋져 보이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때문에 DMZ평화통일대장정을 추억하는 수기를 써보자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꼭 이 문장으로 나의 글을 시작하고 싶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장정을 위해 떠나는 나의 아침은 이와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는 곳이 멀어 새벽부터 일어났지만, 이불은 밤새 덮었던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고 가방은 터질 듯이 빵빵해서 어제 밤까지 ‘무엇을 더 가져가야 할 지’ 고민했던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섬유탈취제를 가방 안에 챙겨 넣은 뒤 그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 신한대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평생 잊지 못할 2016년의 여름, 350km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오리엔테이션 장소에 도착해서는 미리 편성한 대로 팀을 나눠 장비를 지급받았다. 그때는 잠시 뒤 우리에게 다가올 고난을 알지 못했기에 새 옷과 새 신발을 받아 마냥 좋았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소풍이라도 온 듯 신나서 떠들어대던 이들이 UDT출신 진행요원들의 등장과 통제에 조용해지던 모습이. 우리는 그들의 통제를 받아 애써 챙겨온 개인물품들을 꼭 필요한 물건만 빼고 전부 반납했다.
그렇게 우리들은 서서히 완주라는 목표를 품은 원정대의 대원이 되어갔다. 단 하루의 짧은 오리엔테이션이었지만 우리를 바꾸기엔 충분했다. 발대식 때 우리들의 악에 받친 구호를 들은 사람이라면 모두 동의할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내리쬐는 뙤약볕보다 더 뜨거운 구호를 외쳤던 우리의 모습은,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광기에 가까운 열정 그 자체였다. 그때부터 불타오르기 시작한 열정은 고성 통일전망대로 이동해, 본격적인 대장정의 첫 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파주 임진각에 도착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꺼지지 않았다.
안타까웠던 것은 열정이 있다고 고통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열정과는 별개로, 배낭을 짊어진 채 무더위와 싸우며 걷는 길은 정말 힘들었다. 뜨거운 태양에 익어버린 피부, 발바닥의 절반을 차지한 물집, 발목과 무릎의 통증이 동시에 우리를 괴롭혔다. 나의 경우에는 물집은 심하지 않았지만, 예전에 다친 발목인대의 통증이 심해 고생했다. 덕분에 중반 이후부터 진통제는 떼어놓을 수 없는 나의 동반자였다.
하긴 진통제를 먹으며 견딜 수 있는 근육통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약이 따로 없는 물집은 정말 많은 이들을 고생시켰다. 터뜨린 물집 위에 새로운 물집이 생기는 일도 다반사였고, 발가락만한 물집을 달고 있던 친구도 있었다. 여기에 장염이나 생리까지 겹치면 그야말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고통들이 아니다. 결국 이를 이겨내고 완주해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왜 이 걸음을 시작했으며, 어떻게 이 고통들을 이겨낼 수 있었는가.
나의 경우에는 우연히 본 “도전하지 않는 젊음은 낭비일 뿐이다”라는 슬로건에 반해 별다른 고민 없이 무작정 참가를 결심했었다. 주위에서는 왜 사서 고생을 하냐며 말렸지만,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고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거라며 끝끝내 밀어붙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엄홍길 대장님과 함께 며칠 걷는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통일을 염원하며 DMZ를 걷는다는 것도 전혀 안중에 없었다. 대학생 신분으로 참여할 수 있는 다른 대외활동들과 별다를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이었다. DMZ평화통일대장정은 단순한 ‘대외활동’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짧다면 짧은 15박 16일간의 여정만으로 나를 바꿀 수 있었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낯 간지럽지만, 확실히 이번 완주는 내게 큰 깨달음과 인식의 전환을 주었다. 먼저 분단조국의 현실을 인지하고 통일을 바라게 되었다. 또한 고난을 이겨내는 방법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했을 때의 달콤함을 몸소 배울 수 있었다.
이렇듯 완주의 결과는 만족스럽지만, 그 과정에서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너무나도 많았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을까. 이 정도면 충분히 하지 않았나. 이제 그만할까’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가 포기하지 않도록 힘이 되어준 세 가지 버팀목이 있었다. 바로 ‘엄홍길 대장님’과 ‘동료들’ 그리고 ‘우리가 걷는 길’이었다. 동시에 이 세 가지는 다른 국토대장정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오직 우리 DMZ평화통일대장정만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계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6좌를 등정한 엄홍길 대장님과 15박 16일간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TV에서, 영화에서, 책에서 보던 모습과는 다른 생생함이 있었다. 대장님은 우리가 힘들어 할 때마다 “자신을 이기는 자가 가장 강하다”라는 뜻의 ‘자승최강(自勝最强)’이라는 말로 우리를 독려해주었다. 그 말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날 깨워주었다. 무자비한 더위 속을 걸을 때나, 쏟아지는 빗속을 걸을 때나, 가파른 진부령 고개를 넘을 때나 나의 상대는 무더위나, 장대비, 가파른 경사가 아닌 그저 나 자신일 뿐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 이겨내면 되었다.
언젠가는 휴식 중에 대장님의 맨발을 본 적이 있다. 이보다 더한 극기(克己)의 길을 수없이 걸었던 그 발에는 그간 걸어온 길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물집 몇 개 잡힌 우리의 발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 발을 본 이후로는, 고작 물집 잡혔다고 엄살 부리지 말고 이겨내라는 대장님의 질책은 더 이상 질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 대장님의 약간은 거친(?) 동기부여였다. 그렇게 나는 힘든 순간마다 대장님의 좌우명과 발을 떠올리며 이겨낼 수 있었다.
이렇듯 대장님께서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셨다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은 동료들이다. 여기서 동료들은 함께 350km를 걸은 우리 대원들, 우리를 위해 앞뒤로 뛰어다니며 고생했던 진행요원들,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도왔던 행정요원 등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다. 물론 가장 소중한 이들은 언제나 붙어있었던 우리 평화팀 전우(戰友)들이다. 우리 팀만은 특별히 동료보다 전우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힘들었던 자신과의 싸움을 함께 이겨낸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팀원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 싸움에서 틀림없이 패배했을 것이다.
6일차쯤 되었던 날, 나는 심한 몸살기운이 있었다. 어떻게든 걸어보려고 했지만,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워 그 날은 앰뷸런스를 타고(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숙영지에 와서도 다른 활동을 할 여력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약을 먹고 쉬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따라 불침번 근무가 있었다. 그것도 가장 피곤한 새벽시간에. 물론 이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앰뷸런스를 탄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나는 거기서 조금이라도 잤으니까. 걷느라 피곤한 다른 동료들이 근무를 서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사실 솔직한 마음으로는 힘들 것 같았지만, 더 이상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던 건지 몰랐던 건지, 그 날 밤은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어느새 잠들었을까,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불침번 근무는 어떻게 된 것일까. 쏟아지는 빗소리에 중간에 한번 깼던 기억은 어렴풋이 났다. 하지만 분명 불침번 근무로 날 깨운 사람은 없었다. 어리둥절해 있던 것도 잠시, 어쨌거나 푹 자서 몸 상태와 기분 모두 좋았다. 같은 텐트의 동생들에게 어제 불침번근무였는데 아무도 깨우지 않았다며 신나서 자랑했다. 동생들도 웃으며 잘됐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난 아침식사 시간에야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있었다. 내 몸 상태를 걱정한 우리 텐트의 막내가 지난 밤 나 몰래 근무를 바꿔준 것이었다. 그제야 아침의 웃음이 이해가 갔다. 형이 되어서 동생을 고생시킨 것이 부끄러워 그 때는 고맙다는 말밖에 못했지만, 속으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감동이었다.
타지에서 아픈 것만큼 서러운 것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동료들이 있었기에 아무 문제없었다. 똑같은 고생을 하고 있으면서, 자신도 힘들 텐데 아픈 동료를 챙겨주는 이런 인연들을 어디서 쉽게 만날 수 있을까. 정말로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나의 바램이었어”라고 노래하고 싶은 인연들이다. 이런 동료들이야말로 내가 완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마지막 버팀목은 우리가 걸었던 그 ‘길’ 자체였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다가도 그 길이 보여주는 풍경과 그 의미를 되새기면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DMZ 인근의 민통선 안쪽을 걸을 때는 더욱 그랬다. 분단된 조국의 가슴 아픈 현실을 보여주는 그 길에서 내가 걷는 것을 포기해버린다면, 통일을 향한 우리의 걸음도 멀어지는 것 같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못할 정도로 힘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어김없이 천혜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나타나 힘이 되어주었다. 특히 강원도 양구에서 보았던 두타연의 모습은 정말 압권이었다. 그런 풍경을 보며, 언제 또 다시 이런 장관을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는’ 350km의 길이었다.
나는 결코 내 열정과 도전정신, 즉 내 능력만으로 이번 대장정을 완주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버팀목과, 그 밖에도 내가 인식하지 못한 수많은 도움들이 있었기에 해낸 것이다. 때문에 앞으로 살아가다보면 틀림없이 이보다 힘든 고난들을 만나게 되겠지만,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번처럼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면서, 주위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겨내지 못할 일은 없을 테니까. 이것이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고난을 이겨내는 방법이자, 대장정을 통해 배운 가장 큰 깨달음이다.
운동용어 중 세컨드윈드라는 말이 있다. 이는 격렬한 운동을 하다가 죽을 것처럼 힘든 시기, 즉 데드포인트를 극복한 후에 느낄 수 있는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몸이 그 격렬함에 적응해 다시금 힘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세컨드윈드라고 생각한다. 전환점이 되는 데드포인트는 이번 대장정이었다. 그 정도로 이번 완주는 불과 몇 주 전의 무기력했던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두 번째 바람’을 타고 비상(飛上)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이야기일까? 아니, 이는 함께 완주한 우리 4기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갈 수 있다!”함께 흘린 땀이, 함께 흘린 눈물이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모두의 비상을 확신한다.
소중했던 2016년의 여름, DMZ평화통일대장정의 길을 추억하는 나의 글은 끝났다. 걸었던 길과 이 글에는 끝이 있지만, 우리 인연에는 끝이 없다. 여기서 시작된 우리의 인연은 이제 시작이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통일이 되어 한라에서 백두까지 이르는 진정한 평화통일대장정을 할 때 우리 4기 전원이 다시 모여 걷고 싶다. 그 날이 오면, 꼭 그렇게 다시 모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