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창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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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황진선 <논객닷컴> 편집인,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전에는 3대를 세습한 북한 정권이 창피했다. 한데 지금은 남한의 박근혜 정권도 창피하다. 혹시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더라도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 누가 이렇게 창피하게 만들었나. 박근혜 대통령이다. 국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대통령에게 화가 난다.

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21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최순실씨 취미가 대통령 연설문을 수정하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질의에 “(연설문 의혹) 기사를 보고 실소를 금지 못했다.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가 어떻게 밖으로 회자되는지 개탄스럽다”고 답했다. 누구나 “설마 그럴 리가…”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제 대한민국은 실소의 대상이자, 봉건시대 국가만도 못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2015년 1월 최순실씨의 전 남편 ‘정윤회 문건’을 유출(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박관천 전 경정의 말도 황당한 것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검찰 수사 초기에 우리나라의 권력 서열에 대해 “최순실씨가 1위, 정윤회씨가 2위,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비슷한 증언은 또 있다.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은 최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는 통념을 무너뜨리는 건데, 사실 최씨가 대통령한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시키는 구조다. 대통령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없다. 최씨한테 다 물어보고 승인이 나야 가능한 거라고 보면 된다. 청와대의 문고리 3인방도 사실 다들 최씨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 전 사무총장은 최순실씨가 거의 매일 청와대로부터 30㎝ 두께의 ‘대통령 보고자료’를 건네받아, 이 자료를 갖고 국정 전반을 논의하는 비선모임을 운영했다고 말했다. 비선모임에는 차은택씨가 거의 항상 있었다고 했다.

지난 25일 박 대통령은 춘추관에서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취임 전과 취임 후 상당 기간 “일부 연설문과 홍보문에 대해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며 최순실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사전에 본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 그만뒀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최씨는 연설문뿐만 아니라 국정 전반에 관여한 것이 언론의 취재로 드러났다. 국무회의 회의자료, 지방자치단체 업무보고 자료, 박 대통령 일정, 청와대 민정 수석 인사 관련 서류, 남북 군 접촉 기밀 등이 최씨 사무실 등에서 나왔다. 이성한 전 사무총장은 비선모임의 주제에 대해 “한 10%는 미르, K스포츠 재단과 관련한 일이지만 나머지 90%는 개성공단 폐쇄 등 정부정책과 관련된 게 대부분”이라며 “이 모임에서 인사 문제도 논의했는데 장관을 만들고 안 만들고가 결정됐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지난 8월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감찰과 관련해 조선일보 기자와 잠깐 통화한 것에 대해 국기를 흔드는 중대한 위법행위라고 했다. 박관천 경정의 ‘정윤회 문건’ 유출 사태 때에도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행위”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그 말들을 되돌아봐야 한다. 지금 청와대의 자료 유출과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에 비하면 이 전 특별감찰관이나 박 전 경정의 유출 건은 새발의 피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의 공적 체제를 무시한 채 최순실씨에게 모든 일을 믿고 맡기다시피 한 것으로 보인다. 법치주의를 무시하고 권력을 사유화했다. 최씨를 사이비 목사이자 승려였던 아버지 최태민의 후계자쯤으로 여기지 않았나 싶다. 최씨가 국정을 의논할 만한 상대였는지도 의문이다. 최씨는 독일로 떠나면서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비롯해 200여개의 파일이 들어있는 자신의 태블릿 PC를 사무실에 방치함으로써 JTBC가 입수해 분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지도교수를 찾아가 벌인, 공사를 구분할 줄 모르는 안하무인적인 태도 역시 조금이나마 의식이 있는 비선 실세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과적으로는 박 대통령의 실체에 대해 좀더 분명히 아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지만, 만약 최씨가 자신의 태블릿 PC를 없애거나 숨겼다면 박 대통령의 하야와 탄핵이 거론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진솔한 사과와 진상 규명이다. 박 대통령은 최씨에게 일부 연설문과 홍보문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했지만 거짓이거나 변명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지금 국민은 대통령 때문에 화가 나 있고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해 있다. 지금까지와 같은 자기 모순적인 사과로는 국민에게 용서를 얻기 어렵다. 최씨와의 관계와 청와대 자료 유출 건을 거짓없이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 조사를 방해하고 거짓말로 진상을 덮으려다 탄핵 당할 처지에 놓이자 스스로 사임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여겨야 한다.

새누리당은 26일 오후 의원총회를 열어 ‘최순실 특검’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만큼 절체절명의 위기로 느낀 것이다. 박 대통령도 특검을 통해 진상이 규명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 검찰이 총체적 진실을 밝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야당은 물론 새누리당의 비박계에서도 이번 사건을 유례가 없는 국정 농단, 국기 문란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진상 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국민은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현 검찰 수뇌부는 역대 검찰 가운데 가장 비중립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에는 검찰이 외압에 흔들릴지언정 외압을 불러들이지는 않았는데 이번에는 외압을 스스로 부르는 것 같다. 이를테면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은 사실상 검찰로부터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한 수사 관련 보고를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셀프 수사’라는 비난이 나왔다. 중앙선관위가 20대 총선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의원 12명 중 검찰이 새누리당 친박(親朴)계 김진태·염동열 의원만 불기소한 데 대해 불복해서 법원에 재정신청을 한 것 역시 상징적이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26일 대통령과 최순실씨 문제와 관련해 청와대 및 내각의 인적 쇄신을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특검 수사에는 성역이 있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은 독일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최순실 모녀가 귀국해 검찰의 수사를 받도록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 한다. 특검에서는 최씨와 언니 순득씨, 동생 순천씨 일가의 수천억원에 이르는 재산 형성 과정을 추적해 봐야 한다는 주장도 살펴야 한다.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도록 되어 있지만 국정 조사를 받는 것은 별개 문제다. 박 대통령은 최소한 국정 조사에 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병우 수석은 즉각 사퇴하고 검찰 수사를 받아야 한다. 우 수석은 처가 부동산 넥슨 매각 관련 의혹 이외에 청와대 입성에도 최순실씨와의 연결고리가 작용했다는 신빙성 있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회 운영위원회는 26일 국정감사의 증인 출석을 거부한 우 수석을 만장일치로 검찰에 고발하기로 해 이제 검찰 소환은 시간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이원종 비서실장과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모금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권력의 사유화를 방조한 ‘문고리 3인방’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도 당연히 물러나야 한다.

박 대통령은 국정을 이끌어갈 동력을 상실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개헌 문제에는 일절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섣부른 개입이나 국면 전환용 카드는 반감만 살 뿐이다. 개헌은 국회와 국민에게 맡겨두어야 한다. 새누리당은 탈당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정권 재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새누리당의 어느 대권 주자가 박 대통령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오히려 박 대통령을 비판하고 박대통령과 차별화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할 것이다. ‘청와대 방패막이’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거취도 관심사다. 곤두박질치는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율을 감안한다면 조기에 지도부를 교체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민심 이반으로 박 대통령이 국정을 이끌어갈 수 없는 것으로 확인되면 새누리당 일부 비박계 인사와 야당이 주장하는 거국 중립내각의 구성도 검토해야 한다. 아직도 박 대통령의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상황에서 아무런 구심점 없이 세월을 허송하면 우리의 경제 및 안보 위기는 더 가중될 것이다. 야당도 당연히 국정 운영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

박 대통령의 탄핵과 하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민심을 잘 살펴야 한다. 용서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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