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홧김에 역사가 바뀌다”···나세르 수에즈운하 국유화·아이젠하워는 2차중동전쟁 주역 영·프 협박

Source: Wikipedia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오른쪽)이 1960년 미국을 방문해 뉴욕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담을 하고 있다.

페르디낭 드 레셉스 ‘암호’?

[아시아엔=김중겸 전 인터폴 부총재, 전 경찰청 수사국장, 서울경찰청 정보관리부장] 1956년 7월 26일 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해방광장. 자유장교단 혁명성공 4주년 기념식이 5만명 이상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일부에선 25만명이 운집했다고 추산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수백만 국민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국민들은 서방세계로부터 고립돼 의기소침해 있을 나세르 대통령을 위로하려 했다. 하지만 나세르는 정반대로 자신만만했다. 그의 입에서 폭탄선언이 터졌다. 나세르는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수에즈 운하회사를 거론했다.

“운하는 우리 희생으로 건설됐다. 그런데 외국이 부당하게 지배하며 우리가 차지해야 할 부를 착취해갔다. 이제 이런 상황을 끝내려 한다. 운하를 국유화할 계획이다. 그 수입으로 아스완댐을 건설하겠다.”

나세르는 울분을 토했다. 연설 초반에 언급한 페르디낭 드 레셉스는 암호였다. 이집트군은 즉각 출동해 수에즈운하 점거하라는 대통령 지시를 따랐다.

이집트는 고대로부터 부강했다. 해운 절정기 로마제국의 항구마다 이집트의 옥수수와 유리, 시리아의 옷감과 기름, 술과 송로, 이에 그리스의 대리석이 쌓였다. 그뿐인가. 아프리카 모피와 운모에다 영국의 굴과 거위 그리고 사냥개가 하역됐다.

500톤에 이르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로마 배가 직접 실어와 바티칸에 모셔 놨다. 부유한 로마시민들은 배를 타고 그리스로 가 올림픽을 구경하고 에게해 섬들을 일주했다.?이들은 이집트 고적을 관광하며 이집트 왕과 여왕의 유구한 역사에 경탄했다. 품질 좋은 이집트 곡물을 듬뿍 사가 창고에 쟁여놓았다.

해적은 없었지만 항로 확인은 언제나 골치 아팠다. 북극성을 보며 뱃길을 찾다가 12세기에 콤파스를 발명했다. 하지만 자석침은 마법 도구여서 사용했다가는 마녀로 몰렸다. 당연히 보급이 잘 안됐다. 콤파스와 천체관측의가 널리 보급된 15세기에 이르러서다. 하지만 실수가 빈번해 1000km나 목표지점에서 벗어나곤 했다.?항해의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돼지였다. 돼지를 바다에 빠트리고 헤엄쳐 가는 방향을 따라가면 됐다.

기원 전 2000년경, 나일강 지류와 홍해 사이를 이집트 상선이 다녔다. 서아프리카에서 금과 상아를 운송했다. 비비와 원숭이도 실어날랐다. 운하는 건설과 파괴를 되풀이하며 완공 직전 중단하기도 했다. 적군이 운하를 이용해 쳐들어온다는 신탁(oracle, 信託) 때문이었다. 토사 유입이 너무 많아 물길이 막히기도 했다.

18세기 말 나폴레옹이 건설을 시도했다. 홍해쪽이 10m 높아 운하를 만들면 지중해로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러면 대홍수가 난다. 결국 포기했다. 그런데 헛소문이었다. 실제로는 25cm 높았다. 헛소문에 속은 것이다.?1854년, 프랑스 외교관 레셉스가 사이드 파샤 이집트 국왕의 특허를 따냈다.?4년 뒤 수에즈운하회사를 설립했다. 주식 40만주 중 16만7천주는 왕이 소유하고 나머지는 프랑스인들이 가졌다. 1869년 완공됐다. 100년간 조차(租借)키로 결정됐다.

1875년 영국이 이집트 왕의 주식을 매입해 44%의 지분율로 최대 주주가 됐다. 7년 뒤인 1882년 영국은 군대를 동원해 수에즈운하를 점령해 버렸다.

이집트 독립과 혁명 그리고 수에즈운하 접수

제1차 세계대전 후 민족운동이 고조되던 1922년, 영국으로부터 이집트가 독립해 입헌왕국이 출범한다. 12년 후 나치스가 대두하면서 1936년 영국군이 다시 주둔했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눌러 앉았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는 패했다. 부패가 원인. 왕과 대지주 및 부르주아로 구성된 정당 즉 와후드당이 문제라고 인식됐다. 1952년 군부 쿠데타를 축출하고 공화국이 수립했다. 집권 나세르는 농지개혁 등 과감한 사회개혁을 추진했다. 1956년 세계은행으로부터 차관 2억달러 도입이 결정됐다. 나일강에 아스완댐을 건설하고 농업생산 50% 증대를 추진했다.

이때 미국이 나서 이라크 중심의 바그다드조약기구를 만들었다. 유럽세력 견제용이었다. 나세르는 가입을 거부했다. 대신 체코로부터 무기를 구입하고 소련과 우호관계를 돈독히 했다. 미국·영국·프랑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돌연 세계은행 차관이 취소됐다. 배후엔 미국이 있었다.

1956년 6월, 최후의 영국군 부대가 철수했다. 앓던이가 빠진 것이다. 마침내 7월 26일. 수에즈운하를 이집트 소유로 만들었다.

제2차 중동전쟁, 미·소의 원폭 협박에 영·프·이스라엘 무릎꿇어?

7월 27일,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 이튿날. 영국의 로버트 앤서니 이든 수상은 이집트의 국유화 선언에 단단히 화가 났다. ‘영국군 철수 한달도 안 돼 국유화라니 이런 배신이 어디 있나?’ 영국은 혼자서는 되찾기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물귀신작전에 돌입한다.

“운하 이권을 포기할 것이냐?”며 프랑스를 선동하고 이스라엘에게는 “이 기회에 시나이반도를 가지라”고 꼬득인다.?이윽고 파리 남서쪽 11km 지점 세브르에 한밤 중 군용비행기가 착륙했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군관계자가?회동해 이집트 침공계획을 짰다.

10월 29일 계획대로 이스라엘 군이 먼저 쳐들어갔다. 테러기지를 공격하고 시나이반도만 점거한다고 발표하고 방향을 틀어 수에즈운하까지 진격했다. 11월 5일 영국과 프랑스 공수부대는 포트사이드를 침공, 하룻만에 수에즈와 시나이를 완전 점령한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든 수상에게 물었으나 이든은 딴청을 부렸다. “우린 그저 수에즈운하를 보호하려고 간 것이다. 이스라엘 군사행동은 나중에 알았다.” 아이젠하워는 버럭 화를 냈다

11월 5일. 영국·프랑스 두 나라 공수부대가 이집트를 침공한 당일 소련의 불가닌 외상이 영국과 프랑스에 서한을 보내 “원자폭탄을 쏠 용의가 있다”고 했다. 미 CIA 알렌 덜레스 국장은 젊었을 때 인도를 갔다가 영국인의 악랄함을 봤다. 인도인 학대와 수탈을 목격한 그는 영국인은 인간 이하라 보고 혐오했다.

덜레스 국장이 영국 정보 관계자에게 말했다. “아직도 식민지 망상이 남아있는가. 인도에서 그렇게 나쁜 짓 하고 이집트도 많이 빨아 먹었지 않았소? 그리고 말이오. 이번에 말썽 일으킨 당신네 세 나라가 주고받은 통신, 세브르에 비행기 타고 간 거, 그때 의논하고 결론 낸 거 내가 한번 읽어보리다.”

11월 14일 이집트 침공 열흘도 채 안 된 날, 유엔 정전 결의가 통과했다. 미국은 소련의 원자탄 투하계획을 지지한다고 밝혔다.?11월 15일 영국과 프랑스는 즉각 철군하고 이집트에서 힘을 상실했다. 이제 미국과 소련의 시대로 넘어갔다. 나세르는 아랍의 리더가 됐다.

아이젠하워의 화는 오랜 동안 풀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한테 애기도 안 하고 전쟁 나섰다는 것이었다. 상의도 없이 일을 벌린 바로 그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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