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MI6 제7대국장·베트남전의 사이공 CIA지부가 몰락한 까닭
제1화 영국 MI6 국장
[아시아엔=김중겸 전 인터폴 부총재, 서울경찰청 전 정보관리부장] 모리스 올드필드, 영국 MI6 7대 국장. 1973년부터 1978년까지 재직했다.
영국수상과 취미도 싱글도 같아 잘 나가던 정보요원의 최후
부국장 때다. 보수당 당수 에드워드 히스가 수상이 됐다.?히스와 올드필드가 만났다.
“부국장! 독신이라며? 나하고 같구먼.”
“저는 오르간도 연주합니다.”
“그래? 언제부터 했어?”
“어렸을 때입니다. 동네 교회서요.”
“한번 겨뤄볼까?”
“그거보다야 합주가 어떠신지요.”
“그게 좋겠구먼. 둘이 맞춰볼까.”
히드가 말했다. “취미 같고 싱글 처지 같고 연주 화음도 잘 되겠다, 일도 조율 잘 될 거 아냐. 내 밑에서 국장 하시게.”
워싱턴 대사관 근무 시절 10대 남창 데려 가는 장면을 FBI 요원에게 딱 걸렸다. 국장 후버에게 보고했다. “사소한 실수에 신경 끄시게. 더 이상 감시하지 말게.”
물러나온 올드필드는 비장의 파일을 꺼냈다. 새 카드 하나를 꺼내 차근차근 기록했다.
대처 수상은 퇴직한 올드필드를 북아일랜드 정보담당 보좌관에 임명했다. 벨파스트 거리에서 연동(?童, male prostitute)을 찾다가 순찰 경찰관에 체포됐다. 그때까지 숨겨왔던 비밀이 만천하에 폭로됐다. 세상이 후버 FBI 국장 같지 않았다. 런던으로 소환돼 해임된 뒤 여섯 달만에 죽었다.
제2화 베트남전의 미 CIA
한국전쟁 당시 미국 정보요원은 2백명이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기습을 눈치 채지 못 했다.월남전에서 미국이 망해갈 무렵 월남에 풀어 놓은 정보인력은 2천명, 미국 안팎의 분석요원은 무려 3천명에 달했다. 그런데도 패배했다.
잘 나간 곳도 있다. 사이공 교외 촐론의 CIA 지부 본부 앞거리 파스퇴르스트리트엔 브로델과 바가 양쪽으로 길게 빽빽하게 늘어섰다. 골목골목마다 도박장과 매춘부가 넘쳐났다.
벌건 대낮에도 마시고 한낮에도 뒹굴고 주야장창 돈내기 했다. 한쪽은 남아 돌아가는 공작비 쓰고 다른 한쪽은 살기 위해 몸과 웃음을 팔았다.
그런데서 무슨 정보가 나오나? 욕망과 투기와 허무가 난무하는 곳에서는 허위를 거래한다. 적군의 능력과 의도는 가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