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석의 쿠르드분쟁지역 억류기⑧] “나는 빠삐용을 꿈꿨다”
[아시아엔=이신석 <아시아엔> 분쟁지역 전문기자] <빠삐용>을 어릴 적 수십 번 읽었다. 책 커버이자 그의 가슴에 새겨진 나비 즉 ‘빠삐용’은 ‘자유’라는 의미다.
어릴 때부터 나를 강하게 통제하려는 사람과 집단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했던 과거가 있다. 운동부 코치선생님으로부터 탈출 말이다. 그렇게 무서웠던 담임선생님에게 반항하고 탈출했다. 탈출을 감행하여 느끼던 한줌의 공기는 ‘진정한 자유’라는 마약같은 일탈감을 인생 내내 느끼게 해주었다.
군생활 동안 부대를 여러 번 벗어나기도 했다. 밤에 막사를 혼자 몰래 벗어나 철조망을 통과해서 한참을 긴장하여 달려나가면 주한미군을 주로 상대하던 불야성 기지촌이 나타난다. 나는 어느새 단골클럽으로 숨어들었다. 미군을 맞기 위해 화장을 진하게 한 호스티스들은 자신들처럼 사회적 약자이기도 한 졸병군인을 누나처럼 챙겨주었다. 좌석에 앉으면, 내가 맡겨놓은 술을 가져온다. 늘 버번위스키였다. 테네시주 깡촌에서 만들어진 오크향 강한 버번은 콜라가 없으면 들이키기 힘들었지만, 스트레이트로 목젖을 적시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마치 화기에 덴 듯 버번은 입속으로 넘어가고 한국담배보다도 저렴한, ‘몰래 빼돌린’ 양담배를 입에 문다. 그러면 어디선가 ‘서던 록’(Southern rock)이 나온다. ‘Free bird’가 들리는 날이면 강렬하고 짧게 세상을 살다간 그룹 ‘레냐드 스키냐드’의 리더 로니 반 젠트를 기억하며 술을 들이켰다. 자유를 들이마셨다.
터키 군경에게 잡히고 나서 나도 모르게 매순간 본능적으로 탈출을 생각했다. 나는 그런 나 스스로를 통제해야만 했다. 그들의 압송에 따라 그들의 차에 오르는 순간, 그리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 병원에 갔을 때 등등 모든 찰나마다 나는 탈출을 감행하려고 기회를 봤다. 그리고 탈출을 위해 스스로를 강하게 통제해야만 했다.
내가 압송돼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실 건물은 요새화되어 탈출이 불가능해 보였다. 화장실이나 식당이나 어딜 가든지 대원 두세 명이 밀착 감시했다. 상황실을 빠져나가 1층까지 운 좋게 들키지 않고 내려간다 하여도, 1층은 건물 경계를 위해 40여명이 대기하는 대원용 임시막사가 있었다. 담 높이는 3m 가량 됐다. 담을 넘어도 그 위에 1m 가량 설치된 날카로운 철조망을 뛰어넘어야 한다.
정문엔 분대병력 8~9명이 근무하고 있어 이들 눈을 피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탈주를 한들 시가지 전체를 곳곳에서 감시하는 카메라를 벗어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탈주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회는 있다!
만약에 나를 압송하는 과정에서 부비트랩에 차량이 걸린다던가, PKK가 차량을 공격하여 탈주 기회가 잠시라도 생긴다면 난 주저없이 탈출할 것이다. 내가 지금 조사받고 있는 이 자리에 곱게 남아있다고 한들 그들은 나를 압송해 억류하는 이유를 내게 돌려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뿐인가? 나는 기소되어 재판정에 서고 교도소에 갇히는 운명이 될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목숨을 걸고 PKK에 합류하여 산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수도 없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겠지만, 나는 ‘노아의 방주’가 있는 산을 따라 이라크 북부 산으로 숨어들어 자유의 길을 택할 것이다.
범죄인으로 취급되어 터키든 한국이든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파키스탄의 와지리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갈 곳은 많다. 그 나라들은 전쟁 중이기는 하지만 사람 사는 자유가 있는 곳 아니던가? 이렇게 좁은 상황실에서 감시와 통제를 받다가 좁은 감옥에서 평생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는 것보다야 나으리라.
검사의 최종결론과 상부보고에 따라 내 운명이 좌우되니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결정은 대원들과 원만하게 관계를 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조그만 도시에서 ‘토니’라는 한국인이 붙잡힌 것을 알 정도면 검사와 그 주변인들에게 한껏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게 마지막 숙제이리라. 잡히는 날부터 줄곧 해오던 엔터테이닝 즉 여기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이 바로 그것이었다. 고교동창으로 몇몇 영화에 출연했던 천재배우 봉춘홍이 떠올랐다. 그는 평생 남을 웃기기 위해 살고 있다.
나는 이곳 대원들을 즐겁게 해주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축구를 좋아한다. 어떤 팀을 좋아하냐고 묻는 것이 여기서의 일상이다. 그 중 절반은 이스탄불을 연고지로 둔 ‘갈라타사라이’라는 팀을 좋아했다. 내가 “갈라타사라이의 숙적 베식타스나 트라브존스포를 좋아한다”고 눙쳐대면 그들은 처음에는 화를 내다가 이내 웃고 만다. 어느새 나와 그들은 하나가 돼 있던 거다. 때로는 프로팀도 아닌 쿠르드의 작은 도시의 클럽인 지즈레스포르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들은 배꼽을 잡았다.
대원들은 각기 고향이 다르다. 나는 그들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고, 그 지방을 방문하며 느꼈던 에피소드를 얘기해주었다. 그들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예를 들어 아다나 출신에겐 ‘아다나 케밥’이라고 반쯤 놀리며 치켜 세워주면 어린 아이처럼 좋아했다. 젊은 그들이기에 그럴 것이다.
내가 본 지상최고의 미남 대원 슐레이만은 추운 날에도 가죽자켓 안에 반팔 티셔츠만 입고 다니며 ‘쇼잉’에 몰두 했다. 하루는 그가 없을 때 그를 흉내낸 뒤 그가 다시 상황실에 들어오자마자 그의 행태를 본뜨자 대원들 사이에선 박장대소가 터져나왔다.
대원 가운데는 여성도 여럿 있었는데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여자들이 다들 마르고 날씬하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한 대원은 자신의 뚱뚱한 몸매가 내눈에 못생긴 걸로 비춰질까 걱정하는 듯했다. 무슬림여성의 눈빛엔 자신들 내면의 욕망이 드러난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의 마음을 읽어낸다. 이럴 땐 간단하다. 여성들이 어디 완전한 미를 모두 갖추고 있을 수 있나? 그런 불편해 하는 것을 제거해주면 여성들은 기뻐한다. 그녀의 동선을 좇아가면 된다. 하지만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남자대원들이 나의 이런 행동에 몹시 질투를 한다는 사실이다. 시선을 보내다 맨 마지막에는 그녀 옆의 남자대원에게 이렇게 말하면 된다. “터키여성들(반드시 복수형 어미를 써야 한다!)은 왜들 이렇게 아름답냐?” 그러면 남녀 대원 모두 만족한다.
내가 대원들과 지내며 잘 했다고 생각한 게 또 있다. 그들의 고민을 진심어린 마음으로 들어준 것이다. 늘씬한 체격의 외사과 형사는 어쩌면 한국으로 발령날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우리 서울에서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기혼자로서 가족과 떨어져 있는 형사들에게는 위로의 말을 전하고 별명도 지어주었다. 삭막한 분위기는 어느새 녹아내렸다.
어쩌면 나는 포로로 잡혀 화장실조차 혼자 갈 수 없는 구금상태를 잊고 싶어 억지로 ‘슬픈 삐에로’를 자처했는지 모른다.
대원들은 쿠르드인을 인종청소하는 더러운 전쟁의 수행자지만 이들도 때론 동료 잃은 슬픔에 찬 피해자 아니던가? 정작 전쟁의 근본원인은 서구열강의 끊이지 않는 탐욕 아니던가? 난 이들 한명도 빠지지 않고 사랑했다. 아니 사랑한다.
최종결정이 임박했다. 기소가 된다면 나는 무조건 탈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