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석의 쿠르드분쟁지역 억류기⑤] 합수부 구금 첫날 국경지대 총소리가···

이신석 <아시아엔> 분쟁지역 전문기자가 하카리로 들어가기 전 마을식당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시아엔=이신석 <아시아엔> 분쟁지역 전문기자]??밤이 깊었다. 국경지대에서 들려오는 총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바위산 중턱에 부딪힌다. 그리고 이내 메아리가 되어 사방천지에 가득 찬다. 상황실에는 합수부 요원의 상황접수와 명령하달이 다급하게 이어진다.

합수부 대원 대부분이 작전에 투입된 듯, 상황실에는 3명만이 남았다. 나는 조사를 받던 상황실에서 슬그머니 나와 간이주방 겸 흡연실에 들어앉았다. 전등도 켜지 않은 채 담배에 불을 붙인다. 한 모금 빨 때마다 담배 불빛은 창밖 멀리 보이는 조명탄과 흡사한 듯하다.

이맘 때가 19년째 투옥중인 PKK 리더 압둘라 오잘란의 생일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아마 지금 저 총성은 그의 생일을 기념해 PKK가 그의 석방을 기원하며 벌이는 시위라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친다. 이에 맞선 터키군경은 산 속 PKK 은신지역을 향해 기관총과 자동소총을 마구 쏘아대고 있다.

영어의 몸이 되어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에 담배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나는 어느새 아름답고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로 이끌려갔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음률이 읊어지고, 일찍 돌아가신 누나 생각이 난다.

그때였다.

“토니! 여기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대원 2명이 동행하지 않으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나는 조사실을 벗어나 간이식당에 있는 것을 터키 동북부 도시트라브존(Trabzon) 출신 대원에게 들켰다. 그는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상황실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새벽이 되자 대원들은 전투작전에서 철수해 상황실로 돌아왔다. 대원들은 이곳 하카리 출신이 아니라 터키 전역에서 자원해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진급에 유리한 고과점수를 따기 위해 젊고 야망 있는 대원들이 분쟁지역 근무를 지원한다는 것이다. 나이는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이 많아 보였다. 가끔 40대 이상도 보였다. 그들은 경찰 외에도 검찰, 군대, 법무부, 외교부, 내무부, 정보부 등 여러 소속 기관에서 차출되어 여기 합동수사본부에 모여 근무한다고 했다. 그들은 하카리에 소재하는 타 건물에 근무하는 대테러반 요원과는 임무가 다르다고 했다. 그들은 엘리트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체격과 외모가 특출났다.

슐레이만이라는 대원은 여지껏 내가 본 남성 중에 가장 잘 생긴 것 같았다. 대원들은 내가 테러리스트 조력자로 기소가 되지만, 한국에서 온 언론인이 나의 ‘실체적 모습’이라는 사실은 서로 입소문을 통해 알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의심 많은 정보기관원답게 매의 눈으로 나를 살피는 일에 몰두했다. 그들이 내게 의심 갖는 점은 이런 것들인 듯했다.

첫째, 내가 터키어는 물론 쿠르드어에도 능통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얘기하는 걸 엿듣는 내 표정이 자신들의 대화를 이해하는 것으로 여긴 것 같다. 또 내가 스무번 넘게 터키를 방문하여 장기간 머문 사실도 그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 IQ가 평균이하란 사실은 간과했던 것 같다. 특히 언어에는 더욱 그렇단 점을.

둘째, 20번 넘게 터키를 방문하는 동안 내가 중서부의 아름다운 관광지 대신 동부의 쿠르드지역을 상세히 훑고 다닌 점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것은 그들이 나의 ‘PKK 연루설’을 유추해낼 만한 충분한 자료가 된 것 같다. 사실 필자는 이미 20여년 전 전세계 웬만한 곳은 다녔기에 여간한 곳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런 내게 동부 쿠르드지역의 넉넉한 인심과 올드스타일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더욱이 해맑은 웃음의 그곳 소년들은 나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셋째, 이건 좀 웃기는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내가 혹시

터키여자 즉 무슬림여성을 간음했는지 그들은 의심했다.

그들은 수사 시작과 함께 내 스마트폰을 빼앗겨 그 안에 있는 사진과 이메일, 문자메시지 등을 체크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지인과 동문들이 찬조해 준 물품 중에 여성의류가 있어 호텔 침대 위에 펼쳐서 잘 접어 가방에 넣기 전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들은 그걸 갖고 내가 무슬림여성의 옷을 벗긴 것으로 오버하는 식이다. 내 가방 속에 있던 여성용 의류를 보고 광분하던 대원도 있었다. 그들의 지나친 상상이 나를 여러 차례 위태롭게 했다.

새벽녘이 되니 졸음이 몰려온다. 트라브존 출신의 조사관이 의자 하나를 더 가져와 다리를 올려놓고 자라고 한다. 잠결에 고마웠지만, 눈꺼풀이 안 떠질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아침이 되자 상황실 안은 다시 시끄러웠다. 두어 시간 눈을 붙였나 보다.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대원들은 모두 바빠 보인다. 같이 가자고 할 수가 없어 참아야 했다. 아르펜이 출근하여 내게 속삭인다. “검사의 총지휘 아래 토니 당신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오늘 그 결과를 알 수 있어.”

난 마음 속으로 ‘될 테면 되라지. 기소되면 죽는 거고, 추방당하면 목숨은 보전하겠구나’ 생각했다. 내 운명인데도 불구하고 유체이탈하여 관조하게 된다. 무섭고 심각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이것 아닐까, 관조?

잠시 후 30대 후반의 양복 입고 안경 쓴 사람이 들어오니 모두들 일어나 맞이한다. 그는 내게 “어느 언어가 편하냐”며 영어로 묻는다. 그는 자신이 검사라고 했다. 나는 자세를 곧추세우고 다리를 모아 최대한 예절 바르게 앉았다. 그는 “왜 여기에 왔는지? 무엇하는 사람인지?”라며 편하게 얘기하라고 한다. 나는 일생에 단 한번도 면접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애초에 떨어질 거 같으면 면접을 보지 않았으니. 하물며 20대에 처음 유학 가서 며칠 만에 치르던 인터뷰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에 답을 하기 전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저에게 기회가 왔으니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하지만 원하신다면 기소가 되어 여생을 터키감옥에서 지내게 된다 하여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검사에게 말했다. “누나가 죽은 후 지난 10여년간 홀로 여기저기 봉사를 다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힘들고 낮은 곳이 분쟁지역이라는 것을 알고부터 이런 곳만 다니게 되었다. 사재를 몽땅 털어 다니다 이제는 조금씩 주변 지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약간의 후원을 받게 됐다. 그리고 <아시아엔>에 내가 분쟁지역을 다닌 얘기를 게재하고 있다.”

그는 내가 말을 이으며 “믿지 못하겠지만…”이라고 하자 “계속 말해보라”며 거든다. 2015년년 초 IS로 넘어간 김군을 찾아 터키전역을 다니며 그의 소재를 수소문했던 일도 털어놨다. 물론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이란 등을 다닌 얘기는 뺐다. 그러자 검사는 “당신의 소속 언론사는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불과 2~3년 경력으로 보니 아마추어 기자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Enjoy here!” 하고 자리를 떴다. 상황실의 대원들은 모두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한다. 나도 따라 일어나서 정중하게 목례를 했다. 이제 내 신변에 대한 최종결정은 검사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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