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유럽연합 탈퇴 배경은 대처의 대유럽정책?

Margaret_Thatcher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EU 탈퇴가 결정되면서 영국인들 사이에는 “EU가 무엇이냐”는 의문이 새삼스럽게 일어나고 “아차 지금 내가 무엇을 한 것인가?”는 회오(悔悟)가 확산되고 있다. 의회민주주의의 원조국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박정희의 제3공화국과 유신체제가 그러하듯 국민투표는 악용되는 폐해가 많아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저항이 일어나기도 하였는데 영국에서도 재투표 요구가 일어나고 있다. 재투표를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서에 너무 많은 이용자가 몰려 영국하원 홈페이지가 한때 다운됐다.

만약 재투표가 이루어져 EU 탈퇴가 번복된다 할지라도 영국인의 자존심은 이미 말할 수 없이 구겨질 것이다. 마틴 슐츠 유럽연합 의회의장은 “영국이 정치싸움으로 유럽을 인질로 잡고 있다”며 “영국은 조속히 EU에서 나가길 바란다”고 했다. 장 클로드 EU 집행위원장도 “(탈퇴조건을 협상하기 위해 캐머런 총리가 사임하고 새 영국 총리가 취임하는) 10월까지 기다려달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영국의 EC 가입은 오랫동안 드골에 막혀 되지 않다가 1973년에야 이루어져 EC의 후신인 EU에서야 가능했다. 그전까지 영국은 미국과의 대서양동맹과 커먼웰스를 유지하면서 EU에도 참여하는 외교정책의 3본주(本柱)를 유지하려 해왔다. 이런 어정쩡한 자세로 영국은 EU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EU부담금의 10%를 내면서도 독일, 프랑스에 비해 영향력은 작다. 최근에는 그리스 등 허약한 경제를 지원해야 하였고 무슬림 이민자들의 유입은 영국의 일자리를 잠식하고 앵글로 색슨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었다. 브렉시트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달리 EU 잔류를 택했다. 북유럽의 아테네로 이름 높은 에딘버러에는 1707년 잉글랜드와 합병 전 스코틀랜드 의회 의사당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스코틀랜드 독립을 외치는 여론이 높은 마당에 브렉시트 결과가 EU 탈퇴로 나오자 스코틀랜드 독립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이제 대영제국(United Kingdom)이 유지될 수 있느냐, 사라지느냐는 절체절명의 시점에 와 있다. 영국에는 19세기 대영제국의 ‘영광의 고립’이 아니더라도 유럽의 관료제를 불신하는 전통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그런데 저변에는 대처의 정치철학이 깔려 있다. 이 기회에 대처의 유럽정책이 깔고 있는 논리와 명분을 다시 짚어보자.

“유럽인에 의한 유럽” 주장은 프랑스, 독일이 나름대로 공통이익을 발전시킨 데서 가속도를 얻게 되는데 독일은 통일되더라도 유럽을 주도하기보다는 유럽의 한 부분으로 그 역할을 제한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변국가에 주어서 독일 통일에 대한 주변국의 거부감을 줄이고자 하였고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독일 통일이 어차피 불가피하다면 독일을 유럽연방의 틀 안에 묶어 둠으로써 독일의 영향력을 제한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EC를 보다 통합된 경제 사회적 연합, 나아가 정치적 연합(Political Union)으로 나아가도록 하자는 주장이 모멘텀을 갖게 된 것은 이와 같은 프랑스-독일 간의 공통 이해관계가 근저에 있지만 그밖에도 EC 집행부(EC Commission)의 권한을 증대시키려는 EC 관료들의 노력도 집요하였으며 또한 유럽 각국에 사회당 정권이 증가하였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EC를 보다 강력한 경제연합(Economic Union)으로 강화시켜 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조치는 단일통화(Single Currency)와 단일 경제정책이었으며, 이는 EMU(Economic and Monetary Union)으로 나타나게 된다. 대처는 공동통화(Common Currency)에 대해서는 지지할 수 있으나 단일통화는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졌는데 단일통화와 이를 관리하기 위한 유럽 중앙은행의 설립은 영국?독일 등의 건전한 통화와 다른 나라들의 악성통화를 혼합하게 됨으로써 결국 건전통화를 교란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주장을 폈다.

또한 EC를 일종의 사회적 연합(Social Union)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공동의 사회헌장(Social Charter)를 만드는데 대해서도 강력히 반대하였는데 이 사회헌장이 UN의 인권선언과 같은 포괄적인 선언이라면 모르되, 노동시간, 임금, 휴가, 주택문제 등에 관한 구체적인 정책을 포함하려 한다면 이 역시 실천 불가능한 구두선에 불과한 것으로 각국의 경제, 사회정책을 혼란시키게 될 것이라는 불신을 표명하였다.

대처는 EC Commission에 보다 많은 권한을 주는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는데, 이는 보다 작은 정부, 정부의 중앙통제를 줄이는 정부를 지지해온 그의 정치철학에 입각한 것이며, 특히 브뤼셀이나 스트라스부르그(EC Parliament 소재지) 등의 다국적 관료들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EC Commission의 예산을 증대시켜 장차 일종의 유럽 정부로 발전시켜 나가려는 제안에 대해서 적극 반대하였다.

대처는 EC가 일종의 블록경제가 되어 외부에 대해 보호무역장벽을 쌓아 나가는 데 대해서도 강력히 반대하였는데 전통적으로 자유무역을 선호하고 있는 영국으로서는 세계 무역시장이 좀 더 개방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GATT 체제의 확대, 나아가서 우르과이 라운드 타결이 시급함을 강조하였다. 대처는 유럽이 EC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무역으로 흐르고 있음을 비판하였으며 특히 프랑스가 그 전면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프랑스와 독일이 중심이 되어 EC를 일종의 배타적 경제블록, 나아가 유럽연방(Federal Europe)으로 끌고 나가는데 대한 대처의 일관된 반대는 그의 Bruges Speech에 집약되어 나타났다. 이 연설은 EC는 물론 영국 정가에까지 엄청난 반향을 몰고 오게 되었다. 대처는 EC는 기본적으로 주권국가 간의 적극적 협력관계에 기초해야 됨을 분명히 하고 각국이 각자의 독자성을 가질 때 유럽은 전체로서 보다 강력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대처는 이러한 철학에 입각하여 EC가 향후 취해 나가야 할 정책방향으로 최소 필수적인 규제만으로 시장경제의 활력을 보장하는 유럽 단일시장을 건설하고 보호무역 장벽을 철폐하며 유럽 안보는 어디까지나 NATO에 기반을 두어야 하며, 그밖에 다른 기구 예를 들어 WEU와 같이 미국이 배제된 기구에 의존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대처의 이러한 유럽정책은 영국의 전통적인 대유럽 정책인 “세력균형의 전략”뿐 아니라,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며 유지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그의 정치철학에도 입각하고 있다. 대처의 정치철학은 기본적으로 에드먼드 버크 류의 보수주의에 기반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상적인 슬로건과 과격한 행동보다는 현실과 경험에 입각한 진보를 선호하였다.

이러한 대처의 철학은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가진 한 기자회견에 잘 나타나 있다. 대처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결과적으로 하나의 환상이었고 인간성의 포악함을 폭로해 엄청난 숙청, 전쟁을 몰고 온 재앙이었으며 1917년 볼세비키혁명의 전조이기도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대처는 “인류 역사가 프랑스혁명에 의해 획기적으로 진보하고 이때로부터 자유, 평등, 박애의 시대가 열렸다고 보는 것은 큰 착오”라며 “영국에서는 이보다 먼저, 그리고 보다 적은 희생으로 자유의 확대와 사회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대처의 유럽정책은 이러한 보수적 정치철학에 입각하여 다음 몇 가지로 집약되었다. 즉 △건전한 재정 △최소 필수적인 규제 △작은 정부 △강력한 국방 △영국 국익우선의 대외정책 등이었다. 대처의 이러한 정치노선은 △프랑스와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 △브뤼셀의 EC 관료기구의 역할 확대 △유럽사회 전반의 質을 평준화시키고자 하는 사회정책 △이를 조달하기 위한 과세의 증가 △NATO보다는 WEU를 중시하는 안보정책 등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대처는 외로운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영국은 다시 대처로 돌아가느냐 제3의 길을 발견하느냐는 기로에 놓여 있다.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 말고는 다 할 수 있다”던 영국의회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이런 중요한 문제를 국민투표에 붙인 캐머런은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의회(Parliament)의 주도권이 다시 찾아질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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