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지옥에서 보낸 7일, 그리고 귀환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필자는 지난 6일부터 1주일간 일산병원에 입원 치료 후 퇴원했다. 그간 오랜 당뇨병으로 양쪽 동맥이 막혀 고생하다가 2년 전 혈관시술을 받았다. 그런데 다리가 다시 악화되어 두 번째 시술을 받은 것이다.

너무 힘들었다. 이번에는 양쪽 동맥을 다 받는 바람에 그만큼 더 힘들었다고나 할까? 꼭 지옥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국부마취를 해 의식은 깨어 있는 것 같은데 비몽사몽간에 말 못할 고통 속에 생사를 더듬는 기분이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말로는 죽음에 이르러 의연할 것이라고 큰 소리쳐 왔는데 막상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에 죽음에 이르는 길은 너무나 멀고 험하고 두려웠다.

인간이 고통스런 까닭은 집착 때문이며, 집착을 멸(滅)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게 불가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집착을 어떻게 멸할 수 있을까? 집착에 대한 해답이 주어지면 우리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불교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오온(五蘊:色, 受, 想, 行, 識)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이 12연기(緣起)의 법칙에 의해 생사가 순환된다. 그러니까 생로병사와 윤회의 사슬이 바로 이 오온과 연기의 법칙에 따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과 인식의 전환을 통해 생과 사를 따로 구분하여 생각하기보다는 “삶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는 역설적인 논리로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의 입장을 취한다.

불교에서는 생명의 기원이나, 부처님의 사후 존재 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리고 영혼과 육신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다만 생사를 분리시키지 않고 연기와 윤회의 관점에서 소멸과 생성을 과정적으로 파악할 뿐이다.

특히 태어남이 탐?진?치(貪瞋痴)의 감각기관을 갖춘 오온의 나타남이라면, 죽음은 초기경전들이 말하듯이 오온의 파괴로서, 호흡의 단절과 체온의 떠남 그리고 의식의 소멸을 말한다.

죽음에 대한 이해는 오온의 파괴로 이해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윤회(sa?s?ra)의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윤회는 12연기(無明, 行, 識,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로 설명되는 생로병사의 진행과정과도 직결된다.

인간이 늙고 병들어 죽게 되지만 그 또한 연기와 무아(無我)의 논리를 모르는 무명(無明)으로 인해 해탈을 통한 열반에 들지 못하고 계속되는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른바 윤회는 모든 조건에 의해 유전(流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회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은 조건지어진 과거의 업력에 의해 일어난 현재의 결과로서, 그러한 인과의 사슬은 현재의 업을 통해 미래로 지속되는 것이다. 원인 없는 탄생이 없듯이 원인 없는 죽음도 없다는 뜻이다.

이는 조건이 없어지면 존재도 없어지듯이, 죽음의 조건이 없어지면 죽음도 없어진다는 결과가 된다. 그리하여 죽음을 초래하는 무명(無明)을 떨쳐버리면 죽음도 없어진다는 결론인 것이다. 이것은 12연기를 역(逆)으로 고찰해도 얻어질 수 있다. 결국 삶도 죽음도 윤회의 한 과정일 뿐이지만, 이 윤회의 사슬을 어떻게 풀고 열반에 이를 것인가 하는 것이 불교 최대의 과제다.

불교의 궁극적 가르침과 실천적 수행의 목표는 고뇌와 속박에서의 해탈, 곧 열반(nirv??a)에 이르는 길이다. 열반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최종적 가르침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연기, 업(業), 윤회와 같은 불교 이론의 최종적 해탈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반에 대해서는 초기 부파(소승)불교에서부터 시작하여 후기 대승불교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견해와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예를 들어 부파불교에서는 열반을 번뇌가 없어진 상태로 해석하여, 살아서 깨달음을 통해 얻는 ‘유여열반’(有餘涅槃)과 죽은 후에 깨달은 아라한(阿羅漢)이 얻게 되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상(常)?락(樂)?아(我)?정(淨)’이라는 네 가지 덕(德)을 내세워, 이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위열반’(無爲涅槃)이라고 해석한다. 반면에 소승의 열반을 ‘유위열반’(有爲涅槃)이라고 비판한다. 결국 대승적 관점에서의 열반은 고(苦)를 떠나 낙(樂)을 얻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는 열반락(涅槃樂)의 경지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살아서 혹은 죽어서도 열반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사물의 본질인 공(空)과 무아를 통찰하지 못하고 무명 속에서 행하는 감각에 따른 탐욕과 그로 인한 집착 때문이라는 것이다. 집착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고 윤회를 거듭하게 하는 추동력(推動力)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불교는 수행을 통해 무아를 깊이 통찰하고, ‘자아의식’을 제거함으로써,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 해탈을 통한 자유, 곧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인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윤회하는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는 해탈이 필수조건이다. 해탈이 있어야 열반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다. 이렇게 무아의 법을 체득한 사람은 일체가 무상하고, 고(苦)이며, 무아라 해도 결코 놀라거나 화를 내지 않는 것처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리 8만 대장경을 달달달 외우는 삼장(三藏:經藏 論藏 律藏)법사라도 이 생사의 도를 수행하지 못한 사람은 저처럼 생사의 경계(境界)를 넘나들 때 고통스러운 지옥의 맛을 벗어날 수가 없다. 부지런히 생사를 연마해야 한다.

모두 건강하여 필자처럼 지옥구경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옥에서의 귀환! 어서어서 생사연마에 매진하기를 간절히 축원드린다.

단기 4349년, 불기 2560년, 서기 2016년, 원기 101년 6월 김덕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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