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에고’의 비늘 벗고 자리이타(自利利他) 세상으로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일반적으로 에고(Ego)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고 사회 일반의 이익은 염두에 두지 않으려는 태도를 말한다. 에고이스트(Egoist)는 남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이다. 에고이즘(Egoism) 즉, 이기주의(利己主義)는 자신의 가치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을 뜻하는 자기중심주의(egotism)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기주의의 학설은 자아(自我)가 무엇인가 하는 철학문제보다는 개인의 관심에 대한 상식적인 생각과 더 관련이 있다. 인간은 에고라는 비늘을 벗겨내야 찬란한 인생을 영위할 수 있다. 스웨덴에서 내려오는 ‘에고의 비늘 벗기’에 관한 전래동화가 있다.
총명한 아리스 공주는 부모의 잘못으로 무서운 용에게 시집을 갈 처지에 놓였다. 공주는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 산 너머의 지혜로운 할멈을 찾아갔다. 할멈은 용에게 대처할 방법을 알려주었고, 공주는 할멈이 일러준 대로 웨딩드레스를 열 벌이나 껴입은 채 혼례를 치렀다.
마침내 첫날밤이 다가왔다. 공주는 용에게 자신이 옷을 벗을 때마다 그도 따라 옷을 다 벗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공주의 옷이 한겹 한겹 벗겨지고, 용도 오래된 비늘을 하나하나 벗겨냈다. 다섯 번째 드레스를 벗을 때에 이르자 용은 너무 아파서 눈물을 비오듯 쏟으며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용의 비늘이 벗겨질 때마다 그 피부는 더 고와지고 모습도 부드러워져 마지막에는 아이처럼 빛나는 왕자의 모습이 되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수행의 본질이 담겨있다. 우리가 떠나는 구도의 길은 찬란한 빛으로 들어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강하고도 집요한 에고의 껍질을 벗겨내는 과정은 고통스럽기 그지없어 자신을 합리화하며 도망갈 수도 있다. 씻어내고, 벗겨내고, 내려놓는 가운데 우리의 본래 속살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누구에게나 있는 빛나는 본성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타주의(利他主義)가 있다. 타인의 행복과 이익을 도덕적 행위의 목적으로 하는 생각이나 이론다. 이타주의가 하나의 행동이론으로 정합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익’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이다. 만일 ‘이익’이 고통의 부재와 쾌락을 뜻한다면 대부분의 이타주의자는 도덕적 행위자의 의무가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감소에 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걸 우리는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한다, 자리(自利)란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적공(積功)하고 정진(精進)하여 수도(修道)의 공덕을 쌓아 그로부터 생기는 복락과 지혜 등 과덕(果德)의 이익을 자기 자신만이 향수(享受)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타(利他)란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이익뿐 아니라 모든 중생의 구제를 위해 닦는 공덕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소승불교에서 지향하는 ‘자리’적인 수행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 대승에서는 자리와 이타가 조화를 이루면서 동시에 완전하게 실현된 상태, 곧 자리이타의 원만함이 실현된 세계를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세계가 바로 부처의 세계라고 한다.
자리는 해탈(解脫)을 위한 자기(自己) 수행이다. 오탁악세(汚濁惡世)에 물들지 않고 지혜(智慧)를 쌓는 일이다. 그래서 자리는 상구보리(上求菩提)이고, 이타는 남의 해탈을 돕는 수행이니 바로 하화중생(下化衆生)인 것이다.
즉, 자리이타는 내가 먼저 깨달아 지혜를 얻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 깨닫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 남을 이끌면 둘 다 지옥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그러니까 섣불리 남의 영혼을 구원해 주겠다고 앞에 나서서 전도나 교화하는 이들은 잘못하면 남의 영혼을 망치는 수도 있다.
자칫 종교에 처음으로 입문한 이들이 자기 종교의 우월성만 믿고 남의 종교를 업신여기고, 비판하고, 멀리하는 일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리이타를 생각하게 된다. 어찌 종교뿐이겠나? 모든 분야에서 어리석은 이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작은 지식을 가지고 절대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며 주장하는 것을 보면 여간 걱정되는 일이 아니다.